언어학 고전 가운데 하나인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의 <음운론의 원리>(서울대출판문화원, 2014)가 다시 나왔다. 오래 전에 <음운학 원론>(민음사, 1991)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역자가 동일한 걸로 보아 개정판이라기보다는 재간본인 듯싶다. 중간에 발췌본으로 나온 적이 있지만 완역본이 다시 나온 건 23년만이다.

 

 

학부시절에 언어학 개론 강의를 들으며 트루베츠코이 음운론의 기본 발상과 개념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있지만 당시 <음운학 원론>을 직접 구해서 읽지는 않았다. 문학 전공자로서 내가 한도를 넘어선다고 생각해서다. 내가 읽을 수 있는 최대치는 야콥슨의 <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지성사, 1989)까지였다(이 책의 완역본이 아직 나오지 않는 건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만에 원제에 더 부합하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 소식을 접하니 욕심이 난다(나이를 먹을 수록 관심분야가 넓어지는 건 병일까?). 트루베츠코이는 어떤 인물이었나.

보통 언어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또한 걸출한 사상가였고, 민족지학자였으며, 역사가였고, 철학자였다. 그는 1890년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모스크바 대학 총장을 지낸 철학자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였다. 이러한 가족환경은 트루베츠코이의 지적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민족지학, 언어학, 역사학, 철학 등을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트루베츠코이는 1908년에 모스크바 대학의 역사.언어학과에 입학하였고, 1912년에 비교언어학 분과를 졸업하고, 라이프치히로 가서 청년문법학파의 이론을 공부하는 등 언어학자로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는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언어학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또한 모스크바 언어학 서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신화학, 민족지학, 문화사 등을 연구함으로써 유라시아라는 주제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대귀족 가문이었던 트루베츠코이는 카프카즈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1920년에 마침내 러시아를 떠나 불가리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소피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강의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바로 1920년에 그의 유명한 저서 <유럽과 인류>가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트루베츠코이의 연구는 크게 언어학과 문화 사상사라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언어학 연구에서 그는 1939년에 언어학 분야에서 3대 고전의 하나로 꼽히는 <음운론의 원리>를 출간하였다. 문화 사상사의 영역에서 트루베츠코이는 민족문제와 민족문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점점 유라시아 연구로 경사되었으나, 정치적 성향이 짙은 극단적인 유라시아주의를 배격하고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였다. 

 

'언어학의 3대 고전'은 <음운론의 원리>와 함께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와 블룸필드의 <언어>가 꼽힌다고 한다. 블룸필드의 책은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학문의 기본 저작 가운데 얼마나 많은 책들이 아직 우리말로는 번역되지 않은 것인지 탄식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음운론의 원리> 재간은 반갑고 다행스럽다. 조만간 구해보도록 해야겠다...

 

14. 01. 08.

 

 

P.S. 러시아어본의 표지다. 번역본 <음운론의 원리>는 불어본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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