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휴일'은 아니다. 대학원 시절엔 매번 리포트를 쓰느라 성탄절 기분을 내지 못했다면 강의를 하면서부터는 매해 성적처리로 휴일을 보낸다. 오늘도 예외가 아닌데, 게다가 원고도 몇 편 써야 하니 휴일이 아니라 재택 근무일이라고 해야겠다. 아, 강의는 쉬기에 '휴강일'이라고 하면 틀린 건 아니군...
푸념은 푸념이고,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최근에 나온 프랑스인 저자의 책 두 권을 골랐다. 로랑 베그의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부키, 2013)와 뤼방 오지앙의 <딜레마>(다산초당, 2013).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로랑 베그는 그르노블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이고,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소속의 뤼방 오지앙은 철학과 사회인류학이 전공인 다작의 저자다. 책은 두 권 다 도덕의 문제를 다룬다.
생소한 저자를 만나면 보통 검색을 해보는데, 위키피디아에 이름이 올라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지명도를 가늠한다. 혹은 비영어권 저자의 경우 영어로 번역된 책이 있는지도 판단 기준이다. 두 저자 모두 영어로 번역된 책은 없지만 오지앙은 위키피디아에 간단한 약력과 저술 목록이 뜬다(그리고 책이 스페인어로는 번역돼 있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지앙이 좀더 인지도가 있는 저자로 보인다. 하지만 번역된 책을 기준으로 하면 손이 더 갈 만한 책은 <딜레마>보다는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다. 제목과 표지를 본다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의 원제는 <선과 악의 심리학>이다. 다소 선정적인 번역본의 제목은 핀트를 한쪽으로 몰고 있기에 오해의 소지도 있겠다.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이란 부제는 제목의 선정성을 중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딜레마>도 적정한 제목인지는 의문이다. 번역본의 표지는 디자이너의 딜레마를 반영하고 있을 뿐,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암시도 주지 않는 듯싶다. '어느 유쾌한 도덕철학 실험 보고서'라는 부제와도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원제는 훨씬 선정적이다. 대략 옮기면 <갓 구운 크루아상의 냄새가 인간의 선의에 미치는 영향>이 제목이다. 원저의 표지에도 크루아상은 빠져 있어서 의외인데(갓 구워서 김이 올라오는 크루아상 이미지를 보여주는 건 스페인어판이다), 그렇더라도 번역본의 표지는 너무 심심하다.
하긴 모양으로 보자면 크루아상은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더구나 김이 모락모락 난다면). 번역본은 뒷표지에서야 '따뜻한 한 조각의 빵 냄새는 인간의 선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란 문구와 함께 크루아상이 아닌 베이글 이미지를 붙여놓았다. 어째서 이런 제목이 붙여졌나. 심리학자들의 실험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1달러짜리 지폐를 잔돈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돈을 바꿔주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맛있는 크루아상 냄새가 풍기는 빵집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바꾸어주었다. 그것은 따뜻한 빵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기발하면서도 짓궂은 실험은 우리의 도덕적 본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착한 사람이 착하게 행동하고 나쁜 사람은 나쁘게 행동할 거라는 선입견을 재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적 실험연구의 발달, 특히 뇌영상 촬영술의 발전에 힘입어서 심리학은 인간 본성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심리학 서적들이 강세를 보이는 건 그런 이유일 텐데, 로랑 베그도 실험연구에 근거해서만 본성의 문제를 다루고, 이는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해준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사람들은 확실히 남들과 차별화될까? 그렇다. 하지만 나쁜 방향으로 차별화된다. 한 연구에서 실험참가자들의 논리적 추론능력을 검사했다. 그 결과 성적이 가장 나쁜 부류와 자신의 추론능력을 가장 과대평가하는 부류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은 온갖 능력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반려동물마저 다른 동물보다 우수한 것으로 본다. 자기가 키우는 개는 앞집 정원에서 왈왈대는 똥개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의 인지도에만 기댄다면 손길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와 <딜레마>는 모두 흥미로운 보고와 제안, 그리고 사고실험으로 채워져 있어서 우리 자신과 인간 본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그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은 충분히 제값을 한다...
13. 12. 25.
P.S. 심리학의 인간 이해는 우리가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최근에 나온 강준만의 <감정 독재>(인물과사상사, 2013)와 일본의 정신과 의사 오카다 다카시의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어크로스, 2013)도 읽을 거리다. 오카다 다카시는 <소셜 브레인>(브레인월드, 2010)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