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순간, 나는 아프다>(챕터하우스, 2013)의 부제가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다. 사실은 원제가 그렇다. 책은 <내 생일날의 고독>(실험출판사, 1981; 에디터, 1994)이란 제목으로 두 차례 나온 바 있다. 나는 1994년판을 갖고 있는데, 그때 부제는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였다. 그때도 원제를 살린 제목으로 나왔더라면 했는데, 이번에 또 한번 감상적인 제목으로 개명돼 유감스럽다. 과거 시몬 베유의 책 대다수가 그렇게 떡칠이 되더니 시오랑의 책들도 비슷한 신세다(압권은 <역사와 유토피아>란 책이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이란 제목으로 나온 것. 부제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철학적 험담'이었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시오랑의 책은 <절망의 맨끝에서>를 옮긴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챕터하우스, 2013)와 <독설의 팡세>(문학동네, 2004)가 더 있다(고작 세 권이다). 원제대로 번역된 책은 한권도 없다(<독설의 팡세>는 <고뇌의 삼단논법>을 옮긴 것). 게다가 올헤부터 시오랑 책들을 내고 있는 챕터하우스는 무슨 창조적 발상인지 표지마다 꽃그림이다. 참고로 불어판 원서의 표지는 이렇다.
새로 창조할 것도 없이 비슷하게 흉내라도 냈다면 더 나았겠다. 2004년판의 표지는 이랬었다.
이 책이 347쪽이었는데, <지금 이순간, 나는 아프다>는 296쪽이다. 통상 행수가 줄고 여백이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하면 분량이 줄어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분량을 덜어냈다면 한번 더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과 폐허의 철학자'의 책이라고 해서 이렇게 무성의하게 출간해도 좋은 것인지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13. 12. 08.
P.S. 분량이 줄어든 것 아닌가란 의혹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 답변을 보내왔다(방명록 참고). 다행스럽게도 분량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만 1990년판에 실렸던 인터뷰가 빠졌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분량에 대해서는, 이번 도서는 불어 원서와 일일이 대조를 하였고, 한 구절도 빼지 않고 오히려 몇 구절을 추가하였습니다. 분량이 많이 줄어든 것은, 단순히 페이지로 비교되지 않는 행이나 자간의 차이와, 1990년도 한국어판 도서에 있는 <에밀 시오랑의 인터뷰> 부분이 빠진 것인데, 갈리마르판 불어 원서에 들어 있지 않아서 넣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