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문학동네가 창사 이십 주년을 맞는다. 이번에 나온 <문학동네>(겨울호)에는 이를 기념하여 '문학동네와 나'와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이란 특집이 마련됐는데,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의 한 꼭지를 맡아 쓴 글을 옮겨놓는다. 문학동네 산문집 몇권을 떠올리고 그 소감을 적었다.

 

 

 

문학동네(13년 겨울호) 문학동네 산문집을 떠올리다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이 분명 적지 않으련만 막상 한두 권의 책을 꼽으려고 하니 처음엔 얼른 떠오르는 게 없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뭔가 대표할 만한 책을 속으로 찾았던 것인데, 결국 떠올린 건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비롯한 몇 권의 산문집이다. 가령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과 이성복의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까지 거기에 속한다. 명백히 오랜만에 상기한 일이지만, 나는 이 책들을 여러 차례, 여러 권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준 바 있다. 언제든 다시 구입할 용의가 있어서 이 글을 쓰기 위해서도 한번 더 구입했다. 좋은 책이 대개 그렇듯이 이번에도 제값을 치르지 않고 뭔가 거저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작은 『풍경과 상처』였다. 이 ‘기행산문집’에 실린 글들을 나는 대부분 다른 지면에서 먼저 읽었다. 지금 기억으론 『현대시세계』 같은 잡지에 연재됐던 글들도 포함됐기에. 첫머리에 실린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조차도 한 작품집의 발문 격으로 실린 걸로 먼저 읽었다. 확인이 어려워 기억이 말해주는 바대로만 적자면 ‘내 마음속 호롱불 한 점’ 비슷한 제목이었다. 그게 어느 해 가을인지, 겨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지방 도시의 서점에서 책을 손에 들고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향하는 버스 칸에서 읽은 기억이 또렷하다. 마치 호롱불을 켜놓은 듯 환하게 상기되는 순간이다.


지금 판권면을 보니 저자는 1993년 가을에 서문을 적었고, 책은 1994년 1월에 나왔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거의 첫 책이 아닐까. 혹 출간으로는 첫 책이 아니더라도 분명 내가 구입한 걸로는 첫 책임에 틀림없다. 진작부터 김훈의 애독자였으니 책은 나오자마자 구입했을 터이다. 그리고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로 시작하는 글을 다시 읽었다. 나는 아예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어떤 용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추 이십 년 전이니 기억이 흐릿한 건 이해가 되고 용서도 된다. 맘에 드는 시들도 복사해서 다녔던 걸 고려하면 별다른 용도는 없었을 것이다. 때론 그렇게 넣고 다니던 글들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읽히기도 했던 듯싶다. 좋지 않느냐고. 아, 너무도 오래전 일이다. 이십 년은 청년이 중년으로 늙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구한 『풍경과 상처』는 2009년에 나온 개정판이다. 나는 개정판으로도 두어 번 구입했던 듯싶다. 저자는 “나는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내가 경배하는 만큼 자신의 문장을 경배하지 않는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 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잘 말할 수가 없다”는 고백의 뒷얘기를 이젠 들을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자전거 여행』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기사를 쓰지 않게 된 것이 에세이를 그만 쓰게 된 것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때로 전설은 그 자신이 전설임을 알지 못한다.

 

 


『바람을 담는 집』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린 책이다. 책은 1996년 여름에 나왔다. 저자의 책은 여러 번역서들과 함께 『행복의 충격』 『프랑스문학 산책』 같은 걸 읽어둔 터였다. 지금 다시 펴보니 다양한 제재의 글들을 모은 이 산문집에서 특별히 어떤 대목에 꽂혔던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지방에 있던 어떤 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강력하게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이도 나에게 호응했던 듯싶다. 돌이켜보면 저자의 번역보다도 산문이나 평론을 나는 더 좋아했다. 문학동네에서 ‘김화영 문학선’의 다른 책이 나오기 전이라 독서는 다른 곳에서 나온 『한눈팔기와 글쓰기』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적어도 산문집이라면 나는 ‘김화영의 모든 책’을 읽는다. ‘김훈의 모든 책’을 읽듯이.


『바람을 담는 집』을 오랜만에 뒤적이며 무엇이 나를 잡아끌었던가 생각해본다.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중학교 시절 이래 나는 용돈 중 가장 많은 몫을 책을 사는 데 써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책은 나의 삶 자체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나 역시 그래 왔던 것이니, 마치 내가 쓴 책처럼 읽었으리라. 더불어 저자의 바람은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저자가 “나는 가끔 책이 없는 곳에 있을 때 기이한 해방감, 홀가분한 자유를 맛본다”고 적을 때도 완전 공감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만 하더라도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통로만을 제외하곤 사방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책에 파묻히다’란 말이 언제부턴가 비유도 과장도 아니게 됐다. 저자의 표현으론 ‘책의 요새’고 ‘책의 감옥’이다. 분명 책이 없다면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나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책이 없는 방’을 꿈꿀 때가 있다. 책으로 가득찬 방과 책이 없는 텅 빈 방. 『바람을 담는 집』 이후로 내가 마음에 담는 집이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는 2001년에 나온 책이다. 이성복과 문학동네는 바로 연상하기 어려운 결합인데, 그의 산문집도 역시 문학동네에서 나온 게 됐다. 사실 책은 도서출판 살림에서 나온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과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이성복 문학앨범』에 실렸던 글들을 다시 묶고 거기에다 이후에 발표한 글들을 추가한 것이다. 추가된 글로 대표적인 게 바로 표제글로, 나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발표지면에서 읽었다. 역시나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녔고. 아니 그 정도로 그친 게 아니고 학부 일학년 문학개설 시간에 나눠주고 읽히기까지 했다. 그것도 러시아문학 전공 학생들에게. 지금이라면 그런 ‘열성’이 뭔가 과장되게 느껴질 것 같은데, 조금 젊었던 탓인지 개의치 않았다. 나눠준 다음에 일장 강의까지 한 것은 물론이다.


시인은 무엇을 말했던가. 아니 무엇을 말할 수 없었던가. 어느 비가 오던 날 주차했던 창유리 안쪽에 비에 젖어 들러붙은 석류 꽃잎을 바라본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시 시동을 걸면서는 와이퍼를 몇 번 움직여서 길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그날 그때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나는 비에 젖은 그 작은 석류 꽃잎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시인의 고백이다. 짐짓 고통의 고백이다. 그는 “그날 내 차의 창유리에 혼곤히 잠들어 있다가 한순간 와이퍼의 거센 몸짓에 휩쓸려나간 바알간 석류 꽃잎을 생각해”보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류의 철학 정신이라면, 이성복의 시 정신은 대상의 영역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물과 그 이미지를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내지 못하는 무능력을 그 자체로 진술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날 비에 젖은 석류 꽃잎이 던지는 시각 언어는 이해 가능한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할 것이다.” 흠, 그런 불가능성에 대해 열띠게 강의했던가. 문학에 대해서 제대로 강의할 수 없는 강사의 무능력을 말이다.


문학동네 창립 이십 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초대돼 짤막한 연설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적어나가려고 했지만, 어렴풋한 기억의 언저리에서 몇 권의 책을 끄집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내가 받은 감동과 내가 느낀 공감의 극히 일부밖에 말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유감으로 끝내는 건 멋쩍기에 내게 ‘문학동네’가 떠올려주는 이미지를 끝으로 보탠다. 아마도 1996년쯤일 듯한데, 나는 두 동생과 같이 거주할 전셋집을 여러 곳 보러 다녔다. 비온 날도 있었던 걸로 보아 여름이었지 싶은데, 벼룩시장에 올라온 광고들에 뜬 전화번호를 통해 몇 집 찾아보다가 결국 마땅한 집을 고르게 됐다. 산동네 빌라 삼층이었고, 방이 세 칸짜리라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 집이 문학동네와 무슨 관계가 있나? 집을 보러간 날 내가 쓰게 될 큰방의 이전 입주자는 국문학 전공의 여학생이었는데, 놀랍게도 책장에 계간 『문학동네』가 창간호부터 쭉 꽂혀 있었다. 나대로는 당시에도 꽤 많은 책을 갖고 있는 편이었지만 계간지는 드문드문 구입했기에 아연 긴장할 만한 장면이었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던 다른 계간지들 대신에 『문학동네』가 눈에 띄게 진열돼 있는 걸 보고, ‘세상이 바뀌었구나’라고 느꼈다면 과장일까. 오늘의 문학동네를 생각하면 예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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