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이 또 나왔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자음과모음, 2013). 일기가 아니라고 한 걸 '일기'라고 부른다는 게 역설적이긴 하지만, 여하튼 저명한 사회학자의 일기라는 점에서 최근에 출간된 손택의 일기와 노트, <다시 태어나다>(이후, 2013)도 떠올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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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는 올해 출간된 바우만의 일곱 번째 책이고, <부수적 피해>(민음사, 2013)가 나온 지 한달도 되지 않았다. 가히 기록적이라 할 만한데, 내가 알기론 내년에도 네댓 권 이상은 출간될 예정이다. 1925년생으로 생물학적 나이로는 구순에 육박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수의 근간 리스트가 올라와 있을 정도로 사유와 저술은 현역이다. 놀라움을 넘어서 어메이징하다고 해야 할까(몇년 전 아내와 사별한 이후에도 그 저술의 리듬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번에 나온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는 바로 최근의 일기, 노년의 일기다. 2010년 9월부터 2011년 3월까지, 6개월 가량의 기록을 묶었다. 어떤 기록인가.
일기라고 해서 시시콜콜 ‘오늘의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이 아니다. 바우만이 ‘오늘의 사유’에 대해 기록한 책으로, 그의 전신과도 같다. 매일매일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유로존 경제침체에 따른 집시 인권 문제, 9.11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부수적 피해, 테러리즘에 대한 고찰, 유고슬라비아 내전 범죄의 군상 등 세계 정치 이슈부터 미국 대학생 취업대란을 초래한 국가의 역할 진단, 빈곤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로부터의 불평등 같은 경제 이슈 그리고 인터넷 익명성의 무책임, 페이스북의 영향력, 다문화주의의 선택성 등 사회문화적인 이슈를 다루는 이 일기에서 바우만의 사상을 모두 볼 수 있다.
일기의 형식을 빌린 사색과 통찰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 텐데, 특별한 문턱이 있을 리 없으므로 바우만의 사유에 입문하는 책으로 삼아도 좋겠다. 나는 어제 원서도 바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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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의 일기에서 손택의 일기를 떠올린 건 주문했던 손택의 원서들을 어제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편집하고 있는 그녀의 일기는 세 권으로 묶일 예정인데, 영어판도 2권까지 나온 상태다. 한국어판이 곧 따라가면 좋겠다. 1권에 해당하는 <다시 태어나다>는 1947년 14세 때의 기록부터 담고 있다. 우리로 치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인데, 소녀 손택은 당차게도 자기가 믿는 바를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믿는다
1. 죽음 이후에는 어떤 개인적인 신도, 삶도 없다고.
2.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는 자유, 즉 정직이라고.
3.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다른 점은 지성이라고.
4. 행동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은 궁극적으로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 불행하게 하는가라고.
5. 누가 됐든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6번과 7번 항목 없음)
8. 여기에 더해, 나는 (7번뿐만 아니라) 이상적 국가는 정부가 공공시설과 은행, 광산을 통제하고 교통, 예술장려금, 생활하기에 충분한 최소한의 임금, 장애인과 노인에 대한 지원이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임신한 여성은 태어날 아이가 적출이든 사생아이든 구분하지 않고 국가가 돌봐 줘야 한다.
첫번째 항목에서 '개인적인 신'은 흔히 '인격신'으로 번역되는 'personal god'을 옮긴 것이다. 세번째 항목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지성의 차이만 있을 뿐이란 믿음도 눈길을 끄는데, 나머지 차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고로 우리가 계발할 수 있는 건 각자의 지성뿐이다). 대체로 그녀의 이 소녀시절 믿음은 일생에 걸쳐 관철된 듯싶다. 그런 점에서도 한 지성의 탄생 장면이라고 부름직하다.
바우만의 노년의 일기와 손택의 젊은 시절 일기가 내겐 만추의 일용할 양식이다...
13.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