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에 대해 쓴 리뷰를 옮겨놓는다.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의 절반 정도인데, 사실 '스포일러'의 우려도 있고 해서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돌렸다. 리뷰는 '무라키미 하루키 아카이브'에도 올려져 있다(http://haruki.minumsa.com/reviews/review011/).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어떻게 색채를 갖게 되었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인가.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전작 『1Q84』와 비교해서 특히 도드라진 긴 제목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 소설이다. 전체 19장 가운데 다자키 쓰쿠루가 고등학교 때의 네 친구를 찾아가는(한 명이 죽었으므로 정확하게는 세 친구를 만나러 가는) 순례가 시작되는 건 10장부터다. 핀란드에까지 이른 순례가 마무리되는 건 18장이므로 마지막 19장은 ‘순례 이후’다. 그렇다면, 정확한 구성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1-9장)+‘그의 순례’(10-18장)+‘색채를 찾은 다자키 쓰쿠루’(19장)가 되겠다. 색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순례는 순례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색채가 있는 다자키 쓰쿠루’로의 변화는 따라서 필연적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19장에서 신주쿠 역 벤치에 앉아 명상에 잠긴 쓰쿠루는 자신의 인생이 스무 살 시점부터 실질적으로 멈춰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 찾아온 나날들은 거의 무게가 없었다.”(421쪽) 그로부터 16년이 지났고 이제 중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 문턱에서 만난 여성이 그에게 순례를 권유한 기모토 사라다. 그 순례 이후에 쓰쿠루는 비로소 욕망의 주체, 혹은 갈구의 주체가 된다.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435쪽)라는 고백이 말해 주듯이. 그리고 물론 이런 변화야말로 사라가 그의 순례에서 기대했던 바일 것이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 보자. 서른여섯 살의 쓰쿠루가 서른여덟 살의 사라를 한산한 골목의 조그만 바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네 번째 데이트이고, 세 번째 만났을 때 둘을 쓰쿠루의 방에서 첫 섹스를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오늘’이 두 사람 관계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이란 건 둘 다 직감으로 안다. 앞으로 계속 만나느냐 마느냐, 하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고등학생의 연애’와는 다르다. 남자는 철도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여자는 여행사에서 기획 담당자로 근무한다. 외관상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다.

 

아직 확실한 관계로 나아가기 전단계이지만, 사라에게 쓰쿠루는 자신의 과거 ‘상처’에 대해 털어놓는다. 속 깊은 얘기를 꺼낸 건 그녀에게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한번밖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녀와의 섹스는 기분 좋고 충만한 느낌을 주었다.”(27쪽) 하지만 사라가 받은 느낌은 좀 달랐다. “같이 보낸 밤에, 당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128쪽)라는 게 그녀의 느낌이다. 여자만이 알 수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리감을 느꼈고, 그런 장애물을 갖고서는 진지하게 만날 수 없다는 게 사라의 입장이다. 쓰쿠루는 사라 앞에서 자신이 ‘건강한 성인 남자’라고 느끼지만 자기 욕구의 근간에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뒤틀림’이 깃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가 잘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대해 생각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었다.”(131쪽) 이건 전형적인 정신분석 클리닉의 상황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은 알고 있지만 의식은 알지 못하는 앎을 다룬다. 그것이 우리가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앎과 대면하는 것이 정신 분석의 과정이다.

 

사라가 보기에 쓰쿠루는 어떤 뿌리 깊은 문제를 마음에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129~130쪽)라는 게 그녀가 건네는 충고다. 이것은 정신 분석가의 진단과 처방에 상응한다. 몇몇 여자를 사귀긴 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 적은 없었던 쓰꾸루이지만 사라에게만은 마음을 열고 싶어 하며 그녀의 충고를 따른다. 쓰쿠루가 순례의 길에 나서게 된 과정이다. 이 순례는 물론 자기 발견과 치유의 여정이 될 것이다.


쓰쿠루의 상처란 무엇이었던가. 쓰쿠루를 포함해 다섯 명의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원봉사 활동을 하다가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이름에 색깔이 들어가 있는 네 친구는 각각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라고 불리고(영어식으론 각각 미스터 레드, 미스터 블루, 미스 화이트, 미스 블랙이 된다), 쓰쿠루는 그냥 쓰쿠루였다. 그렇게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차가 없는 다자키 쓰꾸루”가 ‘흐트러짐 없이 친밀하고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대학 진학을 위해 쓰쿠루만이 도쿄로 올라오고, 나머지 네 명은 고향 나고야에 남는다. 그러나 2학년 여름, 그는 네 명의 친구로부터 “우리는 앞으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말도 하기 싫어.”라는 충격적인 절교 선언을 듣는다. 이 갑작스럽고도 가차 없는 통고에 대해서 특이하게도 쓰쿠루는 이유를 끝까지 캐묻지 않는다.(자신만이 색채가 없다는 자격지심이 한몫했을 것이다) 결국 진상을 알지 못한 채 그는 죽음만을 생각하며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는 그 시기를 몽유병자로서, 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자(死者)로서 살았다.”(8~9쪽) 그런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은 쓰쿠루는 더 이상 예전의 쓰쿠루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다. 다자키 쓰쿠루란 이름을 가진 예전의 소년은 죽고 “지금 여기 서서 숨 쉬는 인간은 내용물이 크게 바뀌어 버린 새로운 ‘다자키 쓰쿠루’였다.”(64~65쪽) 이 새로운 쓰쿠루야말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 할 만하다. 하루키가 자주 쓰는 표현으론 ‘텅 빈 존재’다.

 

쓰쿠루가 겪은 외상적 경험이 결코 흔한 종류의 일은 아니지만 ‘상처와 치유의 서사’는 순례의 서사가 그렇듯이 드물지 않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들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한 이후 16년을 ‘색채가 없는’ 상태로 살아왔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긴 하나 현실성은 떨어진다. 하루키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그는 유사 죽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외상을 겨우 추스른 쓰쿠루에게 하이다 후미아키라는 새로운 친구를 붙여 준다. 대학 수영장에서 만난 두 살 아래의 하이다 또한 이름에 회색이 들어가 있어서 ‘미스터 그레이’가 된다. 개인적으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사라의 역할과 하이다의 기능인데, 사라의 역할이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면 하이다의 기능은 모호하다. 아니, 다중적이다. 최소한 네 가지 기능을 열거해 볼 수 있다.

 

(1) 서로 이야기가 통하면서 쓰쿠루와 하이다는 친구가 되는데, 일단 하이다는 쓰쿠루에게 과거의 상처를 묻어 두도록 한다. “나고야의 나날들은 점차 과거의 것으로, 얼마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변해 갔다. 그것은 분명 하이다라는 새로운 친구가 가져다준 진보였다.”(87쪽)

(2) 쓰쿠루의 현실 아닌 현실(현실의 무게감을 갖지 않기에 환영 같은 현실)에서 하이다는 그의 유사 동성애 상대로 등장한다. 그의 성적인 꿈에서 시로(화이트)와 구로(블랙), 두 여자 친구에 대한 동시적 욕망은 하이다(그레이)로 응축된다. 그런 꿈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쓰쿠루는 혼란스러워한다.

(3)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곡 「순례의 해」를 소개함으로써 쓰쿠루로 하여금 시로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이 소설의 배경 음악을 제시한다. 쓰쿠루는 시로가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에서 「르 말 뒤 페이」를 곧잘 연주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르 말 뒤 페이’는 대략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도의 뜻이다. 시로에 대한 기억은 리스트의 피아노곡으로 말미암아 향수 또는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키는 풍경 정도로 고정된다. 즉 그 이상의 정념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방비해 준다.

(4) 아무런 예고도 없이 쓰쿠루를 떠남으로써 하이다는 쓰쿠루의 ‘혼자 남겨질 운명’을 확정한다.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150쪽) 하루키는 특별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강조해놓았다. 네 친구에게서 버림받은 데다가 하이다마저 곁을 떠남으로써 쓰쿠루는 ‘색채가 없는’ 존재로 고착된다. 이후에 그를 지배하는 정조는 멜랑콜리다. 그는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간추려 보자. 주인공 쓰쿠루는 고등학교 만난 네 명의 친구와 함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지만 대학 2학년 때 그들로부터 결별을 통고받고 추방당한다. 그는 이 커다란 충격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금 친구 하이다로부터도 버림받고 그는 텅 빈 존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된다. 그는 엷게, 희미하게 존재한다. 무성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다. 하루키도 여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이야기의 방향은 정해졌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는 어떻게 색채를 갖게 되었나.”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는 하루키의 만드는(作. ‘쓰쿠루’의 한자) 솜씨를 음미하면서 당신이 읽어야 할 몫으로 남겨 놓는다.

 

13.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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