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연재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들을 '무시'하기도 뭐해서 몇 자 적는다. 먼저, 우리 고전에 대한 얘기 몇 마디부터 하고.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났었던 지난주 식목일(화요일) 한겨레에는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실렸는데(이 때문에 화요일에는 한겨레를 보기로 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다루면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최한기의 <지구전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우리가 자랑할 만한 '책'으로 지목했다.


 

 

 

 

 

 

 

 

<지봉유설>이나 <서유견문> 정도는 한국인이라면 국사시간에 달달 그 이름을 외워둔 책들이지만, 정작 몇 명이나 읽어보았을까 의심이 가는 책들이기도 하다. 호기심에 알라딘을 검색해보았더니 <지봉유설 정선>(현대실학사, 1990)과 <서유견문>(서해문집, 2004) 등으로 번역돼 있었다. 물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아직 우리말 번역이 없는 듯하고, 대신에 그의 <기학>(통나무, 2004)이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해서 우리 조상들이 쓴 ‘동서문물의 백과사전’(<지봉유설>)과 ‘개화사상의 교본’(<서유견문>)은 맘만 먹으면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이다.


 

 

 

 

 

 

 

오늘(토요일)자 동아일보의 한 독서칼럼에서는 최한기의 <기학>이 ‘전근대’ 사회 속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과감히 시도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의 문제적인 저작으로 역시 ‘탈근대’ 사회 속에서 근대화의 연속성을 읽어내고 있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2004)과 같이 비교되고 있었다. 칼럼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란 원제를 가진 버먼의 책은 지난 1994년 엉터리 번역으로 출간됐다가 1998년에 개정본이 나오고, 작년에 다시 재개정본이 나왔다. 2004년판을 자세히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페테스부르그’란 이상한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버먼의 책의 한 장은 ‘저개발의 모더니즘’으로서의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할애되고 있다. 푸슈킨의 <청동기마상>과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단편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분석되고 있는데, 버먼은 번역과 2차 문헌만을 읽고서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최상급의 비평적 에세이를 써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에서 그 ‘최상급’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이 경우는 상상력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쥐어짜내게 한다). 나처럼 빈곤한 상상력의 게으른 독자로선 짜증스런 일이다.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현대성의 경험>은 기본자세는 돼 있는 번역서이다. 독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AS해보겠다는 자세 말이다(이전의 졸역본들을 다시 교환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하지만, ‘상상력’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오역서들에는 그런 자세/성의가 결여돼 있다. 아마도 <현대성의 경험>만큼 ‘압박’을 덜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가령, (정말로 믿지 못할) <믿음에 대하여>(동문선)나 (무너지기 쉬운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같은 지젝의 허다한 번역서들은 왜 개정본이 나오지 않는가?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나 부르디외의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등은 무슨 생각으로 개정본을 내지 않는가? 이 문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게 빈곤한 나로서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애꿎게도 또 동문선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수아 도스가 쓴 <폴 리쾨르>. 번역서 분량으로는 890쪽이고 책값도 38,000원이나 되는 ‘숭고한’ 책이다.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은 역시 1004쪽이나 나가고 똑같이 38,000원인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두 책이 일단 내가 손으로 꼽아두고 싶은 책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수아 도스는 리쾨르의 제자이고, 언젠가 방한 강연시에 리쾨르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걸로 들은 것도 같다. 그 책이 지난 1997년에 나온 <폴 리쾨르, 삶의 의미>라는 책이고, 이번 번역서는 그걸 옮긴 것이다.


 

 

 

 

 

 

 

도스의 책들은 그간에 여러 권이 번역돼 나왔지만, 권할 만한 건 <구조주의의 역사1>이다(아날 학파를 다룬 <조각난 역사>는 내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다). 내용이 권할 만하다는 게 아니라 번역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역사>(2-4권)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갖춘 경우에 한에서 도전해볼 만하다. 역사가이지만 디디에 에리봉처럼 굉장히 저널리스틱하게 글을 쓰는 도스이건만 다른 번역본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역사 - 성찰된 시간>(동문선, 2001)은 무슨 암호문 같은 책이고, 작년에 나온 <역사철학>(동문선)은 내가 기피대상으로 꼽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게 <폴 리쾨르>인지라 사실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역자들이 나름대로 최상의 진용이라는 것. <구조주의의 역사1>을 공역한 이봉지 교수 같은 이는 신뢰할 만한 번역자이다. 해서, 가격에 대한 부담만 떨쳐낼 수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 될 것이다.

 


 

 

 

 

 

 

 

폴 리쾨르에 대한 책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사실 그의 <시간과 이야기> 전3권이 완역돼 있고(<살아있는 은유>나 <프로이트와 철학> 등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들이다) 연구서도 몇 권 나오는 등, 게오르그 가다머와 함께 현대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돼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1913년생이지만, 아직도 ‘현역’인(2004년에도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기억, 역사, 망각>이 번역 출간되었다) 리쾨르는 현대사상가로서 한번 도전해볼 만한 봉우리이다.


개인적으론 <살아있는 은유>(영어본은 <은유의 규칙>)의 번역 스터디에 참여해본 적도 있어서 리쾨르가 낯설지 않고, 그에 대한 책들도 많이 갖고 있다. 지난주에는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을 영어본, 러시아본(완역본은 아니고 3/4이 번역돼 있다)과 같이 펴놓고 읽어보기도 했다. <해석의 갈등>은 <악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역자가 긴 문장들을 전부 토막을 쳐서 번역했기 때문에 읽기에는 편하지만 모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들이 많다(리쾨르는 영어본도 가다머보다 읽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용하기가 께름칙하다. <시간과 이야기>는 러시아아로도 아직 완간이 안돼 있는데(3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읽어볼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도스의 <폴 리쾨르>가 출간된 것. 그래서 의미가 있다(재정상 도서관에나 주문해놓았기 때문에 최소한 한달쯤 후에나 나는 책을 손에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은 <과학의 탄생>은 여러 신문에서 크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내용의 방대함 못지않게 저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특이한 이력이 흥미로운데, (1)동경대 물리학과의 수재였다가 (2)1960년대 학생운동 당시 ‘전공투’(우리의 ‘전대협’쯤 되는 건가?) 의장이었고, (3)이후엔 입시학원 물리강사. 무려 20년간 준비해서 63살에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연봉이 수십억에 이르는 입시학원 강사들도 여럿 된다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책을 써줄 만한 입시학원 강사가 없는 건지?(대학 교수들은 ‘문제의식’이 다른지라 이런 종류의 책을 쓸 리 만무하고.)


 

 

 

 

 

 

 

세 번째 책은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이미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로 소개된바 있는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어떤 문제틀을 갖고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하다.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에는 저자의 자전적 (학문)편력과 대담이 수록돼 있으므로 아마도 그 책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도 하다. 창비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는 단발로 끝나고 아직 후속타가 없는데, 좋은 기획인 만큼 계속 이어졌으면 싶다. 이와 보조를 맞출 만한 것이 민음사에서 나오는 ‘현대의 일본지성’ 시리즈인데, 그 외에는 더 많은 기획들이 선보여서 미래 ‘동아시아’ 연대를 위한 사상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 동시에 공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네 번째 책은 문학비평가 서영채의 신작 <문학의 윤리>(문학동네)이다. <소설의 운명>(문학동네, 1995) 이후에 10년 만에 낸 비평집인데, 4년 터울로 책을 냈던 김현이나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김윤식 등에 비하면 젊은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내용도 없는 가운데) 상당하지만, 황종연과 함께 ‘문학권력’ 문학동네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서영채는 주목할 만하다(1991년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을 낸 황종연은 15년 주기로 책을 낼 모양이다(*착오이다. 황종연의 비평집은 2001년에 나왔으며, 내년쯤 책이 보태지면 5년 주기가 된다). 비평가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저마다의 주기가 있다). ‘권력’에 관해서가 아니라 ‘문학’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단정한 문장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그의 글을 많이 읽은 거 같지는 않지만,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문제를 깊이 다루되 ‘오버’하지 않았다. 그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덕은 그가 낸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소설의 운명>에서 (이광수, 염상섭, 이상 연구서인) <사랑의 문법>과 <문학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수율과 단어결합 패턴을 자랑한다(비평서의 제목으로 가장 애호되는 ‘○○과 ○○’도 아니고).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는 문학에서건 생활에서건 ‘바람’을 피울 만한 위인은 아닌 듯싶다.


지난주에 미국의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포크너와 함께 ‘20세기의 두 작가’로도 꼽히는 솔 벨로가 세상을 뜬바, 그의 책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달랑 <클라라의 반지>(한국학술정보, 2004) 정도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뜬다. 거기에 그에 관한 연구서만 서너 권(작품도 없는 연구서라는 건 얼마나 생뚱 맞는가!). 통계상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대략 30% 정도가 번역서라고 하는데(지난주 한국일보 기사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지식생산능력이 전세계의 몇 %나 되기에 고작 30%의 출간률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문제는 번역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번역될 만한 책들이 양질로 번역된다면 그 비율은 60%가 되어도 무방하다), 뒤져보면 없는 책들이 태반이다.


 

 

 

 

 

 

 

 

 

다섯 번째 책은 하는 수없이 안데르센의 <즉흥시인>(웅진닷컴)을 꼽는다. ‘하는 수없이’라는 건 이 작품이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건 그저 그의 동화들뿐이었기 때문에. 1835년작인 <즉흥시인>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낭만주의 소설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올해가 안데르센(1805-1875)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한번 읽어보는 기회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역자는 전문번역가인 김석희씨이다. 믿고 추천할 만하다. 580쪽에 18,000원. 물론 이 책을 손에 집어든다면, <안데르센 자서전>(휴먼&북스, 2003)도 함께 참조하는 게 좋겠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05.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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