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에서 펴내는 반연간지 <연극>(제5호)에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의 인터뷰가 실렸다(그밖에도 흥미로운 인터뷰가 많이 들어 있다). 지난봄 체호프의 <세자매> 공연을 위해 방한했었고, 한양대 이지연 HK연구교수가 인터뷰어로 그를 만났다. 일부를 옮겨놓는다.

 

 

 

연극(13년 여름) 무대 위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위대한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레프 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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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형제자매들>은 당신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 이처럼 하루 종일을 보아야 하는 엄청난 길이의 연극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파격이다. 

 

 

레프 도진: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이다.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은 그러한 깊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점점 단순하게 생각하고 인간의 언어는 점점 짧아져 간다. 인간의 언어가 점차 짧게 축약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인간은 복잡해져야 한다. 길고도 복잡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복잡함을 무대 위에 길게 펼쳐내는 것, 복잡할 뿐 아니라 때로는 모순된 인간의 내면을 무대 위해서 비로소 드러내는 것, 이것이 내가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긴 상연 시간이나 연극의 독특한 형식들은 무엇보다 이러한 관념적이고 사상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의 삶에는 사상이, 관념이 필요하다.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언어, 풍성한 언어로 끊이지 않는 긴 생각을 무대 위에 펼쳐 놓는 것이 내 연극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어제 보니 젊은이들이 많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점점 고속화 되고 간결해지는 이 시대에 그런 젊은 세대가 나의 연극을 보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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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렇다면 현대 러시아 소설 중에서 새롭게 상연을 기획하고 있는 레퍼토리가 있는가?

 

 

도: 늘 원하는데 아직 맘에 딱 드는 깊이 있고 위대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자하르 프리레핀의 『산카』 같은 작품이 맘에 드는데 몇몇 부분에서 무대화에 제약이 있어 상연이 쉽지 않다. 최근 많은 산문 작품들을 읽고 있다. 언젠가 좋은 작품을 만나 그것을 상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신이 지적했듯 나는 늘 시대의 형상을 무대 위에 그려내고자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20세기 러시아의 전 역사를 포괄하는 대작을 만들고 싶다. 1차 대전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혁명과 소련 시대, 소련의 붕괴와 현대 러시아에 이르는 20세기의 전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대작이 있으면 좋겠다. 트리포노프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인>(1988) 같은 작품도 그런 부류의 작품이었다. 2차 대전 코사크들을 다룬 매우 비극적이고 위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무대 위에 연대기를 창조하고 싶다. 그리고 그 연대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삶을 그리고 싶다. 위대한 러시아 소설을 발굴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20세기 초부터 전 역사를 관통하는 그런 작품을 한 번 상연해 보고 싶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으려 한다. 연출가에게 독서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철학 서적을 많이 읽는다. 칸트의 저작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한때 러시아 철학에 심취한 적도 있고 하이데거 등을 비롯한 실존철학에 몰두한 적도 있다. 요즘은 입센과 프리레핀, 콘래드 등을 읽고 있다. 책은 나의 연극의 힘이다. 근데 매일 연극을 올리다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없다.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기만 한다. 그래서 휴가 때가 되어 큰 가방에 책을 가득 채우고 한적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 너무 좋다. 사람들이 전자책 같은 걸 선물해 주기도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건 좀 적응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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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08. 24.

 

 

P.S. 인터뷰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된 작가가 프리레핀이다('프릴레핀'이라고 표기해야 될지 모르겠다). 1975년생 작가로 <산캬>는 2006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국내에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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