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최재봉의 문학풍경'을 옮겨놓는다. 최재봉 기자가 여름에 진행한 '로쟈의 러시아문학 읽기'(http://blog.aladin.co.kr/mramor/6389785) 수강 소감을 올려주셨다. 참고로 이번 가을에 진행할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는 9월 9일 개강 예정이다.

 

 

한겨레(13. 08. 05) 19세기 러시아문학과 보낸 한철

 

월요일 저녁이면 데이트가 있었다. 상대는 19세기 러시아문학. 광화문 북카페로 강의를 들으러 갈 때면 데이트에 나가는 심정이었다. 인터넷 서평꾼으로도 알려진 러시아문학자 ‘로쟈’ 이현우 선생이 강의를 이끌었다. 수강생은 열명 안팎.

 

6월17일부터 7월29일까지 7주에 걸쳐 강의가 진행되었다. 러시아문학의 아버지라 할 푸슈킨부터 체호프까지 일곱명의 일곱 작품. 세 번째 순서였던 레르몬토프를 제하면 매우 익숙한 작가와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강의는 새로웠고 유익했다. 혼자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면서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성취감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강의 내용을 공책에 받아 적어 가면서 공부를 해 본 것이 얼마 만이었던가. 학교 문을 나선 뒤로는 강의를 듣기보다는 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최근에만도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지식나눔 강연’에 나가 말품을 팔았던 터였다.

 

쉰 넘은 ‘아저씨’가 수강생이랍시고 나타나면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듣자 하니 인문학 강좌의 수강생은 절대 다수가 이삼십대 여성들이라던데. 첫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어쩐지 쑥스럽다 못해 주눅까지 드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동료 학생들 중에는 제법 나이 지긋해 뵈는 남성들이 섞여 있었다.

 

푸슈킨이라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다인 줄 알았다. 러시아문학이란 것이 푸슈킨에 와서야 비로소 성립했고, 러시아문학 전체를 ‘푸슈킨 하우스’라 부르며, 푸슈킨의 작품 독자로 한데 묶인 러시아 사람들을 ‘푸슈킨 공동체’라 이른다는 사실을 새로 배웠다. 도스토옙스키가 푸슈킨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청중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든가, 망명작가 나보코프가 푸슈킨보다 꼭 100년 뒤인 1899년에 태어난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식의 ‘푸슈킨 커넥션’도 기억에 남았다. 푸슈킨의 대표작인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오페라로 만들면서 차이콥스키가 주인공 오네긴을 싫어한 나머지 오네긴의 아리아를 만들지 않았다는 ‘여담’ 역시 재미졌다.

 

레르몬토프의 연작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이번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작품이었는데, 그 현대성이 놀라웠다. ‘나와 세계의 맞섬’이라는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는 주인공 페초린은 혐오와 매력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푸슈킨의 결투를 다룬 시 <시인의 죽음>으로 데뷔한 레르몬토프가 푸슈킨보다 무려 열살이나 어린 스물일곱 나이에 역시 결투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흔히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대립을 다룬 작품으로 해석되지만,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전혀 다른 대립쌍을 구성하는 로쟈 선생의 관점이 참신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제목을, 각각 톨스토이의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를 대리하는 두 주인공 이름을 따 ‘안나와 레빈’으로 해도 좋았겠다는 견해 역시 그럴듯했다. 그러나 체호프 희곡 <갈매기>의 여주인공 니나를 긍정 일변도로 해석하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다. 니나에게 과연 그럴싸한 ‘미래’가 있을지, 그는 드라마가 끝나도록 여전히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월요일의 데이트는 일단 끝났다. 가을에는 20세기 러시아문학이라는 새로운 상대와의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이다.(최재봉 문화부 기자)

 

13.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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