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헤겔 레스토랑>(새물결, 2013) 서문을 절반쯤 읽었다. 그 정도가 내가 부릴 수 있는 여유다. 서문에서 지젝은 책의 전체적인 구성과 함께 주제를 미리 말해주는데, 그게 갈릴레이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직역하면 "그래도 그것은 돈다(Eppur si mouve)"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것은 돈다"로부터 모든 존재론적 결론을 다 이끌어내는 게 이 대작의 목표라고 지젝은 적시한다. 그게 헤겔 파트와, 헤겔의 반복으로서 라캉 파트,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고, 번역본으로는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로 분권돼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책을 통독한 다음에야 할 수 있을 터이고, 오늘은 그냥 한 대목만 밑줄을 그어놓는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다. 지젝은 프로이트의 충동("그래도 그것은 돈다"가 바로 충동의 논리다)이 불교에서 비난하는 욕망이나 하이데거가 비난하는 의지와는 다르다고 말하면서(이에 대한 자세한 입증은 본문에서 다뤄진다) 이렇게 언급한다.

죽음 이후에도 도저히 파괴될 수 없는 충동을 대변하는 불유쾌한 '부분 대상'에 의해 지탱되는 성령은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르케고르적 의미에서 죽음의 인접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연속적인 다섯 단계로 나누어 논의하는 퀴블러-로스의 이론을 불멸(성)이라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을 대하는 다섯 단계로 태도로 뒤집어야 한다.(31쪽)

 

 

간단히 죽음 이후에도 성령은 살아남아 불멸하게 된다는 것인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참조되는 건 그녀의 <인간의 죽음>(분도출판사, 2000)이란 책 때문이다. 죽음학(사망학)의 원조 격인 책. 국내에는 <죽음과 죽어감>(이레, 2008), <죽음의 순간>(자유문학사, 2000) 등 여러 차례 번역돼 나온 바 있다(하지만 현재 <인간의 죽음> 외에는 모두 품절되거나 절판된 상태).

 

  

 

이 책에서 퀴블러-로스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 부정과 고립, 2단계: 분노, 3단계: 타협, 4단계: 우울, 5단계: 순응. 가령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해 처음엔 부정하다가 이어서 분노하고, 그 다음에 타협적 태도를 보이다가 체념과 우울의 상태에 빠지고 마지막 단계에 가서 이를 수용/순응한다는 것이다(이런 단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예증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이런 반응은 퀴블러-로스의 고안이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재구성한 것이다. 지젝은 이 5단계를 불멸에 대한 반응에 대입한다.

먼저 그것을 부정한다. "무슨 불멸? 죽은 후 그저 먼지로 흩어질 뿐인데." 그런 다음 분노를 터뜨린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곤경에 빠져 있는가!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네!" 그리고는 타협으로 이어진다. "좋아, 하지만 불멸인 것은 내가 아니라 나 중에서 안 죽은 부분이지, 그건 감수할 수 있어..." 그런 다음 우울증에 빠진다. "여기 영원히 머물도록 저주받은 이상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마침내는 불멸(성)이란 부담을 받아들인다.(31쪽)

이런 대목에 흥미를 느낀다면 지젝의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두꺼운 책을 앞에 둔 독자들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무슨 얼어 죽을 지젝? 안 그래도 읽을 건 많아. 아니 인생을 독서로 낭비한다는 게 될 말이야?" 이어서 분노. "무슨 책이 1,750쪽이나 되냐구? 내가 어지간하면 그래도 읽어주려고 했어. 아니, 이게 무슨 대하-철학이야 뭐야!" 그리고는 타협. "그래, 주변에서 하도 지젝지젝거리니, 내가 읽어는 준다. 대신 서문만 읽는다. 그 정도면 대충 파악은 되는 거 아냐? 사실 이런 책 완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런 다음 우울증. "흠, 이게 생각보다는 재미있는데... 내가 철학책을 다 읽을 수 있다니. 벼락이라도 맞은 건가?" 마침내는 체념과 수용. "하긴 뭐, 내가 휴가라고 여행갈 팔자도 아니었어. 올 여름엔 지젝을 읽는 게 운명인가 보다.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게 원래 내 스타일이야." 

 

 

바쁜 일도 많은데, 이런 페이퍼를 적고 있는 나도 구제불능이다.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인지 어쩔 수 없다. 저녁 먹고 정신 차려야겠다...

 

13.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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