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 활> 창간호가 나왔다. ‘자본에 맞서는 정치, 자본 너머의 정치’가 창간호의 키워드다. 슬라보예 지젝의 기고문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번역을 청탁받고 참여했는데, 그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기고문 외에도 읽을 거리가 풍성하다. 격월간이란 포맷도 새로운 시도로 여겨진다. 아직 받아보지 못했지만 책도 궁금하다 반응도 궁금하다...

 

 

말과 활(13년 7-8월호) 오늘 왜 공산주의인가 

 

만약 역사적 경험에 의해 완벽하게 기각돼야 할 이념이 있다면 바로 공산주의일 것이다. 확실히 공산주의는 20세기 전체를 특징짓는다. 하지만 1990년의 완벽한 패배 속에서 공산주의는 불명예스럽게 종언을 고했다. 그 이후에 공산주의는 단지 두 가지 형태로만 살아남았다. 북한처럼 끔찍할 만큼 기이한 체제와 중국처럼 공산당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쥔 채로 가차 없는 자본주의 관리자로 변신한 나라들이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 그렇게 단순할까? 공산주의 국가들의 해체에 대해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사반세기 전에(1990년) 일어난 사건들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강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꿈이 현실이 됐고 그보다 수개월 전에는 가능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자유선거가 치러졌고 공산당 정권은 마치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졌다. 폴란드에서 어느 누가 레흐 바웬사가 자유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훨씬 더 기적 같은 일이 불과 수년 뒤에 일어났다. 전직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선거를 통해서 권력으로 복귀하고 바웬사는 완전히 주변적인 인물이 됐다. 심지어는 그 15년 전에(1981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자유노조(솔리다르노시치)를 파괴한 장본인 야루젤스키보다도 인기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진보는 파국을 낳는다
‘벨벳 혁명’(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 붕괴를 가져온 시민혁명)의 다음날, 혁명의 숭고한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민주주의-자본주의 세상이 되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을 느끼며 대략 세 가지 태도로 반응했다. (1)“좋았던 옛날”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2)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즘, (3)뒤늦은 반공산주의 편집증. 처음 두 반응은 이해하기 쉽다. 그 두 가지는 오늘의 러시아에서처럼 종종 중첩된다. 수십 년 전에 “공산주의보다 죽음이 더 낫다!”(Better dead than red!)고 외쳤던 우파가 이번엔 또 “햄버거를 먹는 것보다는 공산주의가 더 낫다”(Better red than eating hamburgers)고 중얼거린다.

 

 

공산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중충한 사회주의 현실로 정말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과거에 대한 애도, 과거와 곱게 작별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할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발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동유럽만의 특징이 아니라 글로벌화의 소용돌이에 빠진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 헝가리에서 슬로베니아까지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반공주의(anti-communism)의 부활이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문제와 도전을 낡은 투쟁의 반복으로 몰아넣는다. 동성애와 낙태권에 대한 옹호가 국가를 부도덕하게 만들려는 지하 공산주의 세력의 음모라는 허황한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간혹 폴란드와 슬로베니아에서 그렇다).


이러한 부활은 어디에서 그 힘을 끌어내는 것인가? 어째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시절을 기억조차 못하는 국가들에서 그런 낡은 유령들이 다시 소생하는 것인가? 새로운 반공주의는 “만약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그렇게 더 낫다면, 우리의 삶은 왜 아직도 비참한가?”라는 질문에 간명한 답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가 진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진짜 민주주의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그 현혹적인 가면뿐이다. 소수의 구-공산주의 세력이 새 소유주와 관리자로 변장해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숙청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혁명이 반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책임 추궁이 구 공산주의 체제가 자신들의 실패를 “과거 세력”의 지속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둘러대던 것과 갖는 유사성이다.


이 뒤늦은 반공주의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제시하는 사회의 이미지가 가장 욕을 먹는 전통 좌파가 자본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와 섬뜩할 만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형식적 민주주의는 부유한 소수의 지배를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이미지 말이다. 다시 말해, 신생 반공주의는 자신들이 비정상적인 유사-자본주의라고 기각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자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환멸을 느낀 구 공산주의자들이 포퓰리즘적인 반체제 인사들보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 운영에 더 적합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반공 시위의 영웅들이 정의와 정직, 연대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계속 꾸는 동안, 구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규칙에 자신을 가차 없이 적응시킬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포스트 공산주의 상황에서 반공주의 영웅들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을 대표한 반면에 구 공산주의자들은 온갖 속임수와 부패를 포함한 시장적 효율성이라는 잔혹한 신세계를 대표했다.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폭발을 가능하게 한 중국 같은 나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서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들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중의 역전 속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승리의 대가는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지역에서 자본주의를 이기고 있다는 현실이다.

 

(...)

 

13. 07.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