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30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서평을 쓴 것도 잊어먹고 있었다. 장 지글러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갈라파고스, 2013)를 읽고 쓴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책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쓰인 것이니 '장 지글러의 기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사IN(13. 07.16) 부패의 성소 스위스 은행

 

대표적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이 <뉴스타파>를 통해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소문만 무성하던 ‘검은돈’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지, 그래서 ‘지하경제 양성화’의 전기가 마련될지 궁금하다. 물론 버진아일랜드에 한국인이 은닉한 재산이 드러난다고 해도 전모가 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가 밝혀지기 전에는 말이다. ‘조세피난처의 원조’라는 오명을 덮어쓰고 있는 스위스 은행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때마침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출간돼 단숨에 읽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뉴시스</font></div>6월3일 <뉴스타파>가 버진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같은 베스트셀러 저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장 지글러의 <왜 검은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갈라파고스)는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간 얘기’를 다룬 건 아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 적은 바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스위스는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세 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2013년 현재에도 전 세계 역외 재산의 3분의 1 이상이 스위스 은행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니 놀랄 만한 수준이다. 인간이 거주하는 면적의 불과 0.15%를 차지하고 세계 인구의 0.03%가 사는 이 작은 나라가 1990년 기준으로 세계 2위 금융시장, 세계 1위 금시장, 세계 1위 재보험시장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엄청난 자산 규모를 자랑하는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은 그들이 합법적 거래를 통해 오가는 깨끗한 돈뿐 아니라 회색 돈과 검은돈까지 다룬다는 데 있다. 물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검은돈이다. 스위스 은행들은 해마다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받아들여 은닉하고 ‘세탁하며’ 재투자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1934년에 제정된 은행비밀법 때문이다. 마약조직의 범죄 자금부터 부패한 권력자들의 불법 정치자금까지 온갖 검은돈이 스위스 은행으로 몰려드는 이유다.

‘조국의 배신자’ 욕 먹으며 쓴 책
일례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가 크레디 스위스를 비롯한 스위스 은행 40여 곳에 예치한 돈은 무려 15억 달러(약 1조7120억원)에 달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국부를 국외로 유출하는 데는 복잡한 전략과 수완이 필요했는데, 마닐라에 파견돼 있던 스위스 은행가들은 1968년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독재자의 장물을 빼돌리는 데 매달려야 했다. 아예 자금 이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마르코스는 1978년부터 크레디 스위스의 간부를 취리히 주재 필리핀 영사로 임명했다고까지 하니 뻔뻔함의 극치다. 바로 이런 일을 합작해온 게 스위스 은행의 맨얼굴이다.

탐사 저널리즘을 방불케 하는 저자의 ‘보고서’를 채운 정서는 통탄과 분노다. 연방 법무부에서 일하며 자금세탁방지 법안을 준비하던 법률가가 자금 세탁으로 악명 높은 은행의 법률 자문으로 취업하는 게 스위스의 현실이라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위스 연방의회 의원이었던 저자는 이 책으로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의원의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의식의 봉기와 항거를 말하는 그의 분노는 쩌렁쩌렁하다. “시민의식의 봉기는 스위스 은행 비밀이라는 치명적인 제도를 대번에 쓸어버릴 것이다.”

 

13.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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