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연극인(27호)의 '色다른시선' 코너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http://webzine.e-stc.or.kr/03_story/plan_view.asp?Idx=294&CurPage=1&KeyWord=&SearchName=).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연극 <더 게임 - 죄와 벌>의 비교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몇군데 오탈자는 수정해놓는다...
연극인(13. 07. 04) 원작과 각색 사이의 게임
명품극단의 <더 게임 – 죄와 벌>은 <죄와 벌>, <푸르가토리움>과 함께 ‘<죄와 벌> 3부작’을 구성한다. 연출자 김원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친숙한 걸작을 통째로 다루기보다는 한 국면씩에 집중한다. 그러한 분할은 물론 원작의 무게감을 덜어주고 상대적으로 열린 연극공간을 창출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원작에서 배역과 모티브를 따오긴 하지만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번역극’이라기보다는 ‘번안극’에 가깝다고 할까.
일종의 모티브 연극으로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던 <죄와 벌>과 달리 <더 게임>의 초점은 라스콜리니코프(‘라스꼴리니꼬프’)와 예심판사 포르피리(‘뽀르피리’)의 관계다. 원작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포르피리의 관계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관계와 함께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적 국면이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자백을 유도하려는 포르피리와 그게 맞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신경전은 이 작품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더 게임>은 그 긴장감을 극적 긴장감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둘의 대립을 극의 핵심 모티브로 삼으면서 연출자는 인물의 대비 관계를 더 강화시켰다. 원작에서 포르피리는 30대 중반으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보다는 열 살 가량 나이가 많고, 아버지가 없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겐 유사 아버지와 같은 기능도 갖는 인물이지만 <더 게임>의 뽀르피리는 철저하게 라스콜리니코프와는 적대적인 인물로 설정됐다. 각본에 따르면 그는 ‘종잡을 수 없는 냉혈한으로 냉소적인 뽀르피리’라고 소개된다. 반면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병든 청춘의 치기어린 열정이 내비치는’ 인물이다.
원작 <죄와 벌>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놓인 가난한 법대 휴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할 궁리를 하고 범행 리허설까지 하지만 막상 자신의 저지를 행위에 혐오감을 느끼며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던 범행을 결국 포기하고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당포 노파와 같이 지내는 이복동생 리자베타가 이튿날 저녁 전당포에 없다는 사실을 우연히 엿듣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한 상황에서 예기치 않게 리자베타가 나타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정에 없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바노브나 자매 살해사건’의 전말이다. 살인 사건 이후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신경쇠약에 빠지며 자신의 범행에 대한 자책감과 혐오감에 시달리면서 포르피리와 대결한다. 적어도 논리적인 추궁(심문)에는 밀리지 않겠다는 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뽀르피리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 <더 게임>은 이 대결의 구도를 좀더 일방적인 것으로 설정했다. 뽀르피리는 거미줄을 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포식자이고 ‘병든 청춘’ 라스꼴리니꼬프는 그 피식자처럼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을 위해서 뽀르피리의 성격화도 달라졌다. <더 게임>의 기본적인 상황은 뽀르피리의 첫 자기소개에서 이미 예고된다.
하지만 가끔은 ‘소화하기 힘들 놈들’도 등장한다. 팽팽한 신경을 벌이게 되는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경우다. 자수를 권고하는 정도의 역할에 머무는 <죄와 벌>의 포르피리와는 달리 <더 게임>의 뽀르피리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완벽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자책감과 죄의식에까지 시달리는 라스꼴리니꼬프는 피의자를 궁지에 몰아놓고 노련하게 압박해 들어가는 검사 뽀르피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뽀르피리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라스꼴리니꼬프의 논문 ‘범죄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범행의 동기를 읽어낸다.“이 사건은 금전만이 사건의 전부가 아냐.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라고 판단하는 뽀르피리는 인간을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범죄이론을 범행의 ‘예고장’으로 간주한다.
<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이론, 혹은 초인사상은 인간이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으로 나뉠 수 있고, 비범인은 범인의 한계를 넘어 초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사상의 비범인들, 곧 모든 입법자나 건설자들이 바로 그런 권리를 행사해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자신은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이다. 가난 때문에 휴학중인데다가 하숙집 여주인에게 빚까지 진 처지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주요한 관심사는 그 자신이 과연 비범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같은 역사상의 비범인처럼 자기에게도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한 발작 넘어설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살인은 그런 시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범죄이론의 가공할 만한 결과를 라스콜리니코프의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주인공의 정신적 부활 과정을 보여주는 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였다.
하지만 <더 게임>은 제목대로 ‘게임’에 더 치중한다. 그것은 원작에서 명백히 ‘조연’의 자리에 있던 뽀르피리를 라스꼴리니꼬프와 대등한 인물, 아니 더 나아가 주인공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작에는 없는 뽀르피리와 소냐와의 관계를 새로 고안해 넣은 데서도 알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를 찾아가 복음서에 나오는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원작 대로이다. 범행 이후, 아니 범행을 계획할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분리돼 있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와 함께한 장면에서 그러한 고립을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갱생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소냐에게 리자베따를 죽인 범인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파격적인 것은 여기에 이어지는 뽀르피리와 소냐의 가학적 성애 장면이다. 거미줄이 쳐진 무대 디자인과 함께 <더 게임>을 특징지어주는 장면이다. 어떤 장면인가.
소냐의 목을 맨 밧줄을 든 뽀르피리가 등장해 소냐를 끌고 무대를 누빈다. 그는 돈을 주고 소냐의 몸을 사서 학대한다. 그러면서 소냐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상 <더 게임>에서 뽀르피리는 정의를 구현하는 검사라기보다는 악마의 형상이다.“죄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당신이야말로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선택하는 사람 아닙니까?”라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반문은 <더 게임>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정작 아무렇지도 않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뽀르피리는 법의 이름으로 합법적인 살인을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원작에서와 달리 <더 게임>에서는 뽀르피리 역시 ‘비범인’이다. 하지만 그의 죄는 누가 물을 수 있는가? 관객인가?
고전은 언제나 다시 읽히며 재해석되는 가운데 생명을 유지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지식인 청년의 고뇌를 담은 <죄와 벌>이 <더 게임>을 통해서 한 번 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자극한다. 우리 안의 라스꼴리니꼬프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원작 <죄와 벌>이었다면 <더 게임>은 우리 안의 뽀르피리를 만나보라고 제안하는 듯도 싶다. 원작과 각색 사이의 게임이라고 할까. 원작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게임이다.
13. 07.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