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번역 작업을 하다가, 천 삽 뜨고 한번 허리 펴는 식으로, 잠시 숨을 돌리는 김에('천 삽'은 좀 과장이군)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라인업은 오전에 짜놓았다. 먼저 타이틀북은 불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난다, 2013). '황현산 산문집'이라고 부제가 붙어 있는데,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을 모은 것으로 대부분은 일간지에 실린 칼럼이다. 더러 칼럼들을 읽을 때마다 예리하면서도 품위와 격조를 갖춘 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는데 한데 모은 책으로 읽게 돼 반갑다(영화에 관한 글도 몇 편 들어 있어서 흥미롭다).
지난 80년대와 90년대에 쓴 글도 몇 편 들어 있어서 얼추 삼십여 년을 카바한다. 작년에 나온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와 함께 저자의 전모를 보여주는 듯싶다. '황현산 비평의 힘'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더 정확하게는 어떤 정신의 힘이라고 해야겠다.
두번째 책은 경제학자 류동민의 <기억의 몽타주>(한겨레출판, 2013). '서울 1988년 여름,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이 부제인데, 전혀 예기치 않게도 "마르크스의 <자본론> 번역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 기억과 재현의 의미를 성찰한 한 편의 철학 에세이집"이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위즈덤하우스, 2012)의 '파격'을 뛰어넘는다고 할까(에세이집에서 더 나가면 소설도 나올 수 있을 듯). 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로서 여러 가지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장 지글러의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갈라파고스, 2013).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밝혀낸 스위스 은행의 추악한 진실. 이 책에서 장 지글러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겉모습과 달리 원조 탈세천국으로 악명을 떨친 스위스의 민낯을 샅샅이 파헤치고 있다." 조세 피난처, 더 정확하게는 조세 회피처를 다룬 책으로는 니콜러스 섁슨의 <보물섬>(부키, 2012)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조세 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한국인들의 명단이 뉴스타파를 통해서 속속 폭로되고 있지만, 이젠 '그들'이 어디에다 돈을 숨겨놓았는지 알아야 하는 것도 시민의 자격조건인 시대다!
네번째 책은 찰스 페로의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알에이치코리아, 2013). '‘대형 사고’와 공존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새로운 물음'이 부제다. 제목과 부제만으로도 내용과 의의를 짐작해볼 수 있는 책. "1984년 초판이 출간된 책으로 ‘대형 사고 연구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각종 사고 연구의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끔찍한 사고로부터 사람들이 입을 실질적, 잠재적 피해를 줄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지침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번째 책은 베르트랑 로테와 제라르 모르디야의 <대안은 없다>(함께읽는책, 2013). 부제가 문학적이다. '바보들이 지껄이는 소음과 격정에 찬 무의미한 이야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들이고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가늠할 수 없는데,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이 비판하는 대상은 신자유주의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고 대처와 레이건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이 칼끝을 겨누는 곳은 자크 아탈리, 알랭 맹크, 토니 블레어, 제2좌파, 피에르 로장발롱 등 이른바 ‘티나’를 외치며 시장중심주의에 대한 대안 찾기를 거부해 온 모든 지식인 기득 세력이다. 전 세계의 발등에 떨어진 불,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위기의 시대에 짚고 넘어가 볼 만한 책이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이주의 책으로 골랐다.
|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