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301호)의 '여름의 책꽂이'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상반기 결산 비슷한 모양새가 됐는데, 내가 추천한 책 가운데 하나인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시대의창, 2013)에 대해 적었다. 열일곱 권의 단행본을 펴낸 저자의 책 가운데 한권만 꼽으라면 이 책이 해당할 것이다(거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기에). 두 권을 더 보태자면 그가 자신하는 대로 <철학 VS 철학>(그린비, 2010)과 <김수영을 위하여>(천년의상상, 2012). 그가 준비중이라는 정치철학에 대한 책과 기독교 비판서도 고대할 만하다.
시사IN(13. 06. 22) 철학자 강신주가 술을 끊은 까닭
대중강연과 책을 통해서 독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온 인문학자 강신주가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만났다. ‘끝장 인터뷰’라고 할까, 장장 50여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갈무리한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시대의창)은 강신주표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다.
‘강신주표 인문학’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인문학이 무엇보다도 ‘고유명사의 인문학’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자기 삶과 자기 스타일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서나 글에서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어째서 자기만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건 우리가 저마다 단독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천 년 전에도 없었고, 천 년 뒤에도 없을 거라는 자각이 바로 강신주가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자기 스타일대로 살기 위한 조건이 사랑과 자유다. 사랑을 할 때 인간은 자유롭고 강해진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거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는다. 자유는 독립의 쟁취이기에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령 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혁명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인류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단 한 번의 혁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혁명의 제스처만 있었지 그런 혁명이 일어난 적은 없다. 우리에게 여전히 인문학이 필요하고 인문정신이 요구되는 이유다.
강신주표 인문학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그가 털어놓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일단 인문학자로서는 드물게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학부시절엔 친구들과 소주를 일곱 병 반씩 비우던 그이지만, 대학원 선후배들이 술자리에서만 교수 욕을 하는 게 싫었다고 한다. 술기운에 의지해 술자리에서만 혁명을 하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당당하게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고 뒤에서만 구시렁거리는 태도는 인문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한 번도 누구한테 의지하면서 공부한 적이 없다는 강신주는 학위논문들을 쓰면서도 매번 지도교수와 싸우고 결국 학교를 나와 대학 바깥에 터전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학박사 중에서 어디 가서 굽실거리지 않고 이상한 보고서 안 쓰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지 모른다는 게 그의 자긍심이다.
“모든 인문학은 사랑과 자유에 바치는 헌사”라고 믿는 인문학자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공적은 무엇일까. 기독교와 자본과 국가권력, 세 가지다. 강신주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비판하려면 이 세 가지를 삼위일체로 비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자본만 공격하면 신한테 몰려가고, 신과 자본만 공격하면 국가로 가기 때문에 한꺼번에 공격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 원래 원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무당한테 빌더라도 먼저 작두를 타게 해서 테스트해보는 게 한국적 기복신앙의 건강함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거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신의 노예가 되는 대신에 각자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와 만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게끔 교육하는 것이 강신주가 생각하는 자신의 역할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믿어서다. “사랑해서 스스로 자유를 찾고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정치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정신은 정치적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정신이다.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인문정신의 확산을 통해서일 것이다. 당당한 인문정신의 전도사로서 강신주가 우리에게 아직 소중한 이유다.
13. 0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