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몇년 전 잡지에 실렸던 인터뷰를 발견했다. 교정 초고가 어딘가 저장돼 있었던 것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청소년 잡지 <풋>(2010년 겨울호)에 실렸었다. 인터뷰 내용을 고백체로 처리한 것은 인터뷰어의 고안이다. 자료 삼아 서재로 옮겨놓는다.

 

 

 

풋(10년 겨울호) 어느 문학극대주의자의 거룩한 망상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있어요. 물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겠지요. 편의점 밖에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구요. 저녁을 먹으려고 국수집에 들어갔는데 젊은 점원이 브레히트 시집을 읽고 있어요. 메뉴판을 들고 와서는 내가 손에 든 책을 보며 푸코의 신간이 아니냐고 물어요. 이 정도 사회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학생과 새로 나온 톨스토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국수집에서 브레히트 시가 어떠냐고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뭐 그런 거요. 그런 대화가 일상이 되는 그런 사회요.”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간다. 듣고 있는데, 그를 유명하게 만든 블로그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순간, 차분하게 <저공비행>하는 책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낮은 하늘을 낮은 속도로 선회하다가 문득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고 타인과 타인의 껄끄러운 대면, 그 까실한 침묵을 덜어낼 첫마디가 되기도 하는 그런. 


거센 바람이 부는 겨울 오후, 로쟈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현우 선생님을 만났다. 신촌의 자그마한 ‘까페까페’는 이런저런 소음들로 시끄러웠다. 사람들, 음악소리, 말소리, 차소리. 까페라떼를 마시기로 했다. 나는 최초의 책, 에 대해 묻고 싶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양장으로 된 전집을 처음으로 보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전까지 저는 책을 낱권으로만 접했었거든요. 책이라는 것이 이렇게 집합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있구나……. 충격과 동시에 경외감이 일었지요."

 

아마도 그때 책에 대한 동경이 처음으로 생겨났던 것 같다. 아버지는 책을 낱권으로 사다주셨고, 전집 형태의 책을 갖기까지는 그로부터 2년 정도를 더 기다려야 했다. 아마…… 계림문고에서 나온 문고시리즈를 제일 먼저 봤던 것 같다. 강감찬이나 을지문덕이 나오는 위인전이었다. 당시 지방 소도시에는 서점이 없었기 때문에 책은 주로 방문판매를 통해 유통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카탈로그를 보며 방문판매자와 상의를 한 뒤 계몽사에서 나온 오십 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다. 그때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그때의 어른들에게는 아이에게 무조건 위인전을 읽혀야한다는 강박 비슷한 게 있었다. 세계위인전ㆍ한국위인전 시리즈가 책장의 한 칸을 차지했으니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 외국문학이나 외국사상에 대한 개인적인 편향은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나 싶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세계위인전을 먼저 읽고 한국위인전은 읽다 말았다. 내가 가진 한국 전래동화책도 한두 권뿐이었으니 프랑스 동화책, 영국동화책, 인도동화책 등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외국의 위인들과 그들의 문학에 보다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깜빡 잘못했다가는 성자가 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초등학교 때 했었습니다. 그때 읽었던 위인전의 부작용일지도 모르지요.”

 

싯다르타를 위시해서 대단한 사람들의 생을 접하다보니 일상적인 삶이 사소해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성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 길은 충분히 매혹적이었지만 두려움을 이기고 그 매혹에 맞설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지웠다. 고등학생이 되자 수도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수사 같은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이다. 검약과 절제, 침묵과 수도로 이루어진 삶.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교회선교사에게 붙잡혀서 한두 시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게 개인적으로는 기록적인 대화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과묵하셨고 가족들은 조용한 편이었다. 침묵하는 수도승을 꿈꾸던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걸로 먹고 살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책읽기에 대한 장애를 크게 느껴본 적은 없지만, 글쎄요, 대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긴 했지요. 이제껏 읽어왔던 책들과는 너무 다른, 읽기 어려운 책들을 접하게 되었으니까요. 문제가 된 책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장남이었고, 책읽기를 위한 가이드를 해주거나 지도를 그려주거나 이정표 역할을 해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남달리 책을 많이 읽은 아이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어려운 책을 두루 섭렵했다거나 뭐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독서는 제한적이었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중학교 때 지역도서관이 처음 생기긴 했는데, 열람실 정도의 기능만 있었을 뿐이지 책을 대여해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자 시립도서관 같은 게 생겼지만, 알다시피 우리나라 고등학생에게 시립도서관을 활용하는 시간은 사치나 다름없다. 나는 문학작품 위주로 듬성듬성한 독서를 했을 뿐이다. 그랬으니 대학교 1학년 당시의 나에게 루카치와 토마스 쿤은 그야말로 난해한 충격이었다.

 

“딱히 어떤 계획이나 꿈이 있어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게 된 건 아니에요. 그냥 문학이 좋았고 굵직굵직한 작가들이 좋았지요. 고3때 시험을 마치고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때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폐결핵을 앓은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성적이 안 나와서 영문과는 좀 무리수였다. 나는 속초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에는 노어노문학과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공부를 잘하는 문과 학생들에게는 법학과와 영문과, 두 개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소련 시절이었으니 노문과를 지원하면서도 장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냥 러시아문학이 좋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문학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러시아문학 만큼은 죽을 때까지 읽어도 다 못 읽을 것 같다. 왜라고 묻는다면, 글쎄,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 후진성 때문이다. 여기서 후진적이라는 건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학에서는 이런 가치분화가 비교적 일찍, 그것도 섬세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문학에게 진리와 선을 다룰 것을 요청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미를 다룬다면, 문학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철학사에 나옵니다. 19세기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지요. 러시아인들은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한 논증을 중요시하는 그리스 식 서구철학과는 달리 러시아 철학은 까다로운 논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분석철학을 좀 보면 세밀하고 세련된 논증들이 현기증을 일게 하지만, 정작 다루는 논제들은 사소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인들은 그 사소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현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싫어한다.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을 다루는 것, 이것이 러시아철학 성립의 제1조건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매체는 상관없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를 두고 고민한다면 그게 철학이다. 무엇을 하든 그런 문제들을 붙잡고 사유한다면 그는 철학자다. 그래서 작가뿐 아니라 영화감독도 철학사에 등장한다. 유럽 작가들과는 달리 러시아 작가들에게는 이상한 사명감이 있다.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 이런 전통적이고 계보학적인 사명감은 20세기에도 지속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러시아 문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나는 문학극대주의자입니다. 문학은 사소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 저런 것 그런 것까지 다 간섭하면서 모두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류도 구원해야 하겠고요.” 

 

문학극대주의와 문학최소주의, 이렇게 두 부류가 있다. 문학최소주의는 문학이 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문학최소주의자들은 순수문학을 고집하며 다른 것들이 간섭하거나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다. 무언가 섞인 것처럼 보이면 그때부터 타락한 문학이요 오염된 문학이라고 말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러시아문학은 문학극대주의를 표방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겐 문학이 전부다. 문학이 모든 걸 다 해야 하니 말이다. 러시아문학은 그래서 늘 바쁘고 무겁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런 말을 했다. “러시아 문학에 비하면 프랑스 문학은 천박하다.” 스케일의 차이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고진의 의견에 동의한다. 내가 문학 전공자면서도 철학ㆍ역사ㆍ언어ㆍ예술ㆍ비평 등등에 관심이 많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문학은 총체고, 고로, 다 해야 된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나’ 혹은 ‘자아’에 대한 애착도 없구요. 나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면, 역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애착이 강하다는 것은, 문학극대주의자와 비슷하게, 내가 너무 대단하고 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요. 러시아 문학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기도가 대체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 기도를 하려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구원 받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자기 혼자 구원 받을 궁리를 하는지, 그것도 종교라는 공간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특별한 수행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한 인류로서의 삶을 사는 한 사람을 꿈꾼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인류와 세계에 대해 갖는 긴장감 혹은 긴장관계랄까. 철학에서는 그걸 보편적 특수성이라고 얘기하는데……. 한 개인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인류라는 종의 경험이고, 좀더 확장하자면 한 생명의 경험이고 한 그런 삶. 그런 사람. 자기 자신이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단이기도 한 거니까.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지역에서 출퇴근하는 방위로 근무했어요. 그때 시립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두 권씩 책을 빌려 읽었어요. 소설보다 비평집을 더 많이 읽었지요. 비평가에 대한 의식이 좀 생겨났다고 할까요. 사회 전반적으로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80년대에는 비평의 지위와 위상이 지금과는 달랐지요.”
 
그땐 비평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랬다. 하숙집에 앉아있으면 이번에 누구 비평집이 나왔네 누구 시집이 나왔네 하는 하숙생들의 대화가 그저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김현 선생님도 살아계실 때였고, 비평의 영향력이 꽤 있었던 시대였다. 이때 김현 선생님, 박이문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한국문학비평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학원 진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원에 가지 않으면 중도탈락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뭐, 시대적인 분위기였다고 해두자. 그렇지만 내게 이렇다 할 생계 방편에 대한 궁리가 딱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유학을 갔어야하는데 그러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궁리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나는 조금 게으른 편이었다. 

 

“진로나 장래보다 더 문제가 됐던 것은 책을 사는데 필요한 돈이었지요. 대학원을 다닐 때 조교를 한 것도 물론 책을 사기 위해서였구요. 당시에 조교를 하면 130만원을 받았어요. 그 무렵 도서구입비로 한 달에 50만원을 썼지요."

 

책 때문에 신용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었다. 그땐 대학원생들에게도 카드를 마구 발급해주고 그랬다. 그래서 카드대란이 일어난 거지만. 조교를 관두고 난 뒤 책을 구입한 금액을 갚지 못해서 잠시 신용에 문제가 생겼다. 거래정지. 설상가상으로 결혼을 하자 한달 도서구입비로 2만원이 책정됐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 강의를 하나 했는데 수입이 30만원밖에 안되었으니 뭐. 그렇지만 한 달에 50만원씩 책을 사다가 2만원이라니, 그건 형벌이었다. 나의 글쓰기는 그 형벌에서 다소나마 탈출해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소비적인 행위니까 그걸 재활용이 가능한 행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했던 것이다. 인터넷서점의 ‘이주의 리뷰’에 채택이 되면 몇 만 원 적립됐고, 거기에 혹해서 온라인상에 리뷰나 서평 형태의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텍스트》라는 북매거진에 서평을 싣게 되면서부터는 오프라인 글쓰기도 병행해나갔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연재하고 몇몇 매체에 정기적ㆍ비정기적으로 글을 싣게 되면서 나는 예기치 않게도 ‘서평꾼의 삶’을 살게 되었다.

 

 

 

“온라인이 보급되기 전에,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서평꾼 활동을 하기 전에는 일기를 썼어요. 독서일기 같은 거요. 내용은 간단명료했죠. 메모나 기록에 보다 가깝겠네요. 무슨 책을 샀다. 무슨무슨 책을 읽었다. 어떤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빌렸다. 어떤어떤 책을 복사했다. 이런 메모 수준의 일기가 온라인상의 서평으로 이어진 거지요.” 

 

물론 서평이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의 전부는 아니다. 문학극대주의자로서, 나는 그런 문학의 의의와 정당성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비평을 쓰고 싶었다. 지금의 나에게 서평은 군복무와 같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안 하고 있어서 내가 대신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평은 일종의 기능적인 글쓰기이기 때문에 평생을 바칠 일은 아닌 것 같고, 한 3년씩 로테이션을 하며 근무하면 좋겠다. 그런데 교대를 해줄 후임이 없어서 큰일이긴 하다. 뭐, 정말 쓰고 싶은 글에 대해 묻는다면, 음…… 소설 하나, 시집 한 권, 철학책 하나?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소망이지만…… 그게 전부다. 

 

“일단, 편식하지 말고 책을 읽는 기본적인 독서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편식을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독서력을 갖춰야 하지요. 일주일에 한 권 이상을 2년 정도, 그러니까 백오십 권 정도를 집중해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렇게 꾸준한 독서습관이 생기면 자전거를 타거나 운전을 하는 것처럼 책을 읽게 됩니다.”

 

『책 읽는 뇌』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프루스트와 오징어’. 난독증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쓴 딱딱한 책인데, 핵심은 이렇다. 우리의 뇌는 책을 읽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독서는 인류의 진보와 더불어 생겨난 뇌의 부작용이거나 부가적인 기능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도 독서는 옵션이다. 책을 읽는 것이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에게 굳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다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 최소한의 독서력은 갖추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가 ‘왜 꼭 책을 읽어야 하느냐’라고 당위 어린 질문을 던진다면, ‘속지 않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할 겁니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행사하고 또 주장할 수 있으려면 책을 좀 읽을 필요가 있긴 하다. 물론 시민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스스로를 사회의 잉여라고 생각하기 쉬운 사회 환경에 놓인 88만원 세대에게, 시민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멀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아직 시민이 되지 않았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시민으로서 갖춰야할 기본적인 자질인 글쓰기와 글 읽기 능력 배양을 유보한다면, 그건 잉여의 상태 속에 아예 주저앉는 거나 다름없다. ‘내가 시민이 되고 나서’ ‘내가 먹고 살만해진 다음에’는 조금 늦을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은 하나의 수단이지만 전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예찬론 같기도 한데, 인간이 고안해낸 매체 중에 책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건 없다. 책은, 여러 개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탁월한, 여타의 매체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우리 인식의 근거이기도 하니까. 대조되는 것은 책 없는 삶을 영위하는 원주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을 갖고 있지 않은 문화. 물론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삶의 의미가 있을 거고 책에 상응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으로서의 삶이 대안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내 인생의 한권의 책’은 말이 되지 않아요. 나는 지조가 없어서 한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거든요. 뭐, 굳이 꼽으라면…… 니진스키? 비밀인데, 다 읽진 않았어요. 다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구요.”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그 순간순간들을 함께 견뎌내 주었던 책들이 있다. 그럼에도 니진스키가 내게 특별한 까닭은, 글쎄, 광인의 기록이니까.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니까. 언제 어디서건,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이니까. 언제라도 접속이 가능한 책, 그런 책이 내 인생에 보다 근접해있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도 그런 책 중에 하나였다. 개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제일 좋아하는데, 지금도 아무 페이지나 들추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속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읽을 때마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녹음기를 끄고, 잠시 가벼운 침묵에 잠겼다. 같은 공간에 살아도, 같은 물질을 소비해도, 그 공간을 살아내는 방식과 그 물질을 향유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인류로서의 삶을 사는 한 사람을 꿈꾼다고 했다. 그 꿈에 접속하기 위해 그는 부단히 책을 읽는다. 그에게 책은 접속을 위한 수단이고 목적이고 또 전부다. 어쩌면 한 개체를 넘어 무한히 존재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런 자연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눈과 의식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느릿느릿한 시간처럼…… 책은, 문학은, 그리고 커피는…….


아, 라떼가 식었다. 우리는 일어섰고 외투를 입었고 다음을 기약했다. 돌아오는 길은 다소 멀게 느껴졌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재미난 책이었던가? 나는 웃었던가? 웃어야 하는 건가? 어느 페이지를 먼저 펼쳐야 하는 거지?

 

13.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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