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을 한권 읽으니 하루가 다 지나갔다. 이 정도로는 뭔가 빈둥거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데(더구나 강의도 없는 날이라면!) 만회하는 의미에서 페이퍼 하나를 적는다. 요근래 생물학 책들에 대해 자주 언급한 김에 신간들 가운데 도널드 프로세로의 <공룡 이후>(뿌리와이파리, 2013)를 골랐다. 출판사의 이름을 딴 '뿌리와이파리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열번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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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비니아'는 눈 다섯에 머리 앞쪽에 소화기처럼 기다란 노즐이 달린 마치 외계생명체처럼 보이는 고생대 생물이다. 아래 같은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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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진화, 지구의 진화, 인간의 진화'를 다시 짚어보는 게 시리즈의 취지인데, '오파비니아'를 상징으로 가져온 것은 "오파비니아의 다섯 개의 눈과 기상천외한 입을 빌려 우리의 오늘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더해 열린 사고와 상상력까지 담아내고자" 하는 뜻이라고. 그냥 단순하게는 지질학과 고생물학 관련서들이 시리즈의 목록을 구성하고 있다.
지질학 시대 구분은 좀 복잡하지만 그냥 큰 덩어리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라고 하면 <공룡 이후>는 신생대를 다룬 책이다(오파비니아 시리즈에서 공룡 시대는 스콧 샘슨의 <공룡 오디세이>에서 다룬다. 덧붙여 피터 워드의 <진화의 키, 산소 농도>는 '공룡은 왜 진화했고, 또 어떻게 1억 5,000만 년이나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란 질문에 답한다). '신생대 6500만년, 포유류 진화의 역사'란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신생대는 포유류의 시대다. 공룡의 시대만큼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매력적인 시대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포유류의 시대는 중생대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뿔이 없는 거대 코뿔소, 검치호, 마스토돈트와 매머드, 그 밖의 수천 종의 환상적인 포유류(우리의 조상도 포함된다)가 숨 가쁘게 진화해온 신생대의 이야기도 대단히 경이롭다. 이들의 이야기는 지구의 기후변화라는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경이로운 이야기'이니 만큼 아무 때나 읽을 순 없고, 일상에서 벗어났을 때나 벗어나고 싶을 때 읽음직하다. 고생물학 책을 읽는 건 그 자체로 우리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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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비니아 시리즈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건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2009)다. 그리고 내내 욕심을 내다가 오늘 주문해서 받은 책은 리처드 포티의 <삼엽충>(뿌리와이파리, 2007)과 앤드루 파커의 <눈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20, 30대 때 '방학'이나 '휴가'는 내게 언제나 교양과학서를 떠올려주었다. 모름지기 그런 기간엔 평소에 안 읽는 책, 혹은 일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시공간을 다룬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적어놓고 보니 별로 이상한 생각은 아니군). 방학이나 휴가라고 해서 멀리 갈일이 없는 처지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가봐야 또 얼마나 가겠는가. 천문학이나 고생물학 책이 보여주는 시공간에 비하면 말이다.
하여 입에 잘 붙지도 않는 고대 생물들의 이름을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건 나름 호사다. 메소니키드-파키케투스-암블로케투스-달라니스테스-로드호케투스 등으로 쭉 이어지는 고대고래의 계통도가 현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이기에 호사도 제값의 호사다. 당장은 그런 호사를 누릴 만한 형편은 아니어서, 봄밤에 잠시 기분만 내보다가(책을 쓰다듬어보다가) 내려놓는다. 지질학적 시간이 언제나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바이지만, 인생, 너무 짧다...
13. 0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