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17141831§ion=03). 수주 전에 존 올콕의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동아시아, 2013)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오늘 오전에야 쓴 것이다. 독서가 더디게 진행돼 리뷰도 예정보다 늦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생물학을 바라보는 입각점을 마련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

 

 

 

프레시안(13. 05. 17) 얼음물 테러당한 하버드대 교수, '유전자 결정론자'?

 

존 올콕의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김산하·최재천 옮김, 동아시아 펴냄, 이하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사회생물학 논쟁'의 중간 결산 같은 책이다. 제목에 '다윈 에드워드 윌슨'이 들어간 건 군더더기인데(두 사람의 인명을 그렇게 병기한 의도는 어림해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어색하다) 원제는 좀 더 간명하게 <사회생물학의 승리>이고 2001년에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왔다.

 

물론 과학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신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책이다. 사회생물학 쪽으로도 지난 10년간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나왔을 법하니까. 그럼에도 저자가 '승리'라는 말을 쓸 수 있었다면 그맘때에도 대세는 충분히 기울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까. 그렇다면 사회생물학 논쟁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사회생물학의 승리'를 말할 수 있는가가 일차적인 요점이겠다.

 

 

먼저 저자가 서두에서 묘사한 유명한 에피소드를 음미해본다. 1978년 2월 에드워드 윌슨이 미국과학진흥회의 연례총회에 참석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가 머리 위에다 얼음물 한 주전자를 쏟아 부었다. 그러자 공모자들이 연단에 올라와 윌슨을 조롱하며 플래카드를 흔들어댔다.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교수이며 개미를 비롯한 사회성 곤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학술회의장에서 당한 봉변의 전말이다.

 

 

요즘처럼 스캔들이 넘쳐 나는 시대에는 뉴스거리가 되기도 힘들지 모르지만 과학자사회에선 분명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윌슨은 어째서 비난과 조롱의 표적이 된 것인가. '사회생물학'이란 말을 탄생시킨 1975년 작 <사회생물학>(이병훈 옮김, 민음사 펴냄) 때문이다(윌슨은 이 책으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란 별칭을 얻는다). "하등동물인 아메바의 군체에서부터 현대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행동의 사회학적 기초를 면밀히 탐구한" 책이다.

 

윌슨의 정의대로라면 사회생물학은 '모든 사회성 행동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체계적 연구'이다. 이것이 왜 문제되는가. 그 '사회성 동물'에 인간도 포함돼서다. 윌슨은 대형 말벌인 타란툴라 호크의 사회행동이나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똑같은 학문적 대상으로 다루고, 그렇게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생물학>의 마지막 장을 인간에 할애하는데 그래봐야 전체 분량의 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국내에 <사회생물학 1,2>가 번역돼 나왔을 때 관심을 갖고 읽은 대목은 주로 그 마지막 장이었지만, 그의 '상식적인' 주장은 일부 동료 학자들과 대중에게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인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이론을 창안했다"는 비난이 그에게 퍼부어졌다. 소위 '사회생물학 논쟁'의 발발이다.

 

 

 

사회생물학 논쟁과 관련해서는 프란츠 부케티츠의 <사회생물학 논쟁>(김영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피터 싱어의 <사회생물학과 윤리>(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펴냄), 국내 학자들이 쓴 <사회생물학 대논쟁>(김동광·김세균·김환석 외 지음, 이음 펴냄) 등도 참고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책은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스티븐 로우즈·R. C. 르원틴·레온 J. 카민 외 지음, 이상원 옮김, 한울 펴냄)이다. 놀랍게도 저자들 가운데는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 교수인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와 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등이 포함돼 있었다. 과학계에서 윌슨만큼의 인지도를 갖고 있는 명망가들이 사회생물학에 대해 나치의 우생학과 다를 바 없다는 식으로 공격했고 부정적인 낙인을 찍는 데 성공했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는 문구 자체가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이란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준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은 사회생물학 반대론자뿐 아니라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처드 도킨스를 포함해 전문 진화생물학자라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반대 진영에서는 '사회생물학=유전자 결정론'이라는 프레임을 교묘하게 써먹었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손쉬운 비판이 여론의 동조를 끌어내는 데 유력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사회생물학 논쟁의 시작은 '결정론으로서 사회생물학'이라는 허수아비 비판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저자 존 올콕은 윌슨의 회고적 분석에 따라서(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이병훈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사회생물학 논쟁이 1970년대 중반 미국 대학가의 분위기와 맞물려 진행됐다고 본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캠퍼스 내 좌파 교수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란 개념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행동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사회를 개조하면 자연스레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고 "가난한 자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래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윌슨을 포함해 진화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배계급의 하수인'으로 몰아붙였다. 사회생물학이 오해와 부정적인 평판을 덮어쓰게 된 배경이다.

 

국내에도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번역되고 연이어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가 소개됨으로써, 자세한 학문적 논쟁을 알 수 없는 독자로서는 <사회생물학>의 무리한 주장(유전자 결정론)이 다른 과학자들에게 비판받은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벌써 20년 전 상황이다.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바로 그러한 이해를 교정해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저자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생물학이 불필요한 적개심을 얻는 데 공헌한 잘못된 오해들을 규명하고 제거하여 사회생물학 연구의 진정한 본성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저자가 사회생물학을 둘러싼 오해들을 규명한다고 하니까 어떤 오해들인지에 대해서도 일별해볼 필요는 있겠다. 다음의 여덟 가지이다.

(1)사회생물학은 윌슨 개인의 새로운 이론이다.
(2)사회생물학은 인간의 행동을 주 관심대상으로 삼는다.
(3)사회생물학은 종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형질의 진화를 다룬다.
(4)사회생물학은 어떤 행동 형질은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전제에 기초한 환원주의적 분야이다.
(5)사회생물학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행동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비교한다.
(6)사회생물학은 검증되지 않고 검증 불가능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생산하는 데 특화된 공론이다.
(7)사회생물학은 학습된 행동이나 인간의 문화적 전통을 설명하지 못하며 오직 경직된 본능만을 다룬다.
(8)사회생물학은 어떤 행동을 '자연적' 혹은 '진화된' 것으로 명명함으로써 좋지 않은 인간의 행동을 모두 정당화한다.

사회생물학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독자라면 당연히 이 책에 대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독서 면제니까. 하지만 사회생물학에 대해 좀 들어본 적이 있고,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해온 독자라면 이 책은 요긴한 도움을 줄 수 있다.(다만 저자가 에드워드 윌슨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필력을 자랑하는 건 아니어서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는 조건은 붙는다. 개인적인 독후감으로는 전반부보다 후반부가 더 재미있다.)

 

가령 사회생물학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이자 그에 대한 오해의 유포자이기도 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견해를 보자. 그는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은 "모든 인간행동의 범주가 가능하지만 어느 것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뇌를 상정하는 생물학적 잠재성이라는 사상과 특정 행동적 특질에 해당하는 특정 유전자를 상정하는 생물학적 결정론 사상을 대치시킬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윌슨의 차이를 '생물학적 잠재성' 대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대립으로 규정한다. 열렬한 다윈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굴드는 인간의 문화적 발전에 대해서만큼은 진화의 과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사회과학자들이 주로 이러한 입장에 서는 것은 당연하지만 굴드는 생물학자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이렇듯 '문화가 전부'라고 보는 입장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빈 서판 이론'이고, 문화결정론이다.

 

일례로 집단학살에 대한 설명을 비교해보자면, 굴드는 우리의 뇌가 어떠한 경향성도 갖고 있지 않기에 집단학살은 보편적이지 않고 그 분포양상도 무작위적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살인적인 집단의 수만큼 평화로운 집단이 있다"는 게 굴드의 생각이고 예측이다. 굴드가 보기에 결정론적 생물학(사회생물학)은 인간에게는 집단살인 유전자가 있고 그래서 집단살인은 보편적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게 보는 사회생물학자는 없다는 점에서 이 역시 전형적인 허수아비 비판이다.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유전자는 문화를 가죽 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이라고 말한 바 있다.(굴드는 이런 정도의 입장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모든 것은 유전적 성향과 환경의 만남에서 결정된다.

 

굴드의 예측과는 반대로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에서 이용한 데이터를 참고하여 집단학살이 역사가 기록된 이래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일어났다는 걸 밝힌다. 결코 20세기 문명의 발명품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 "아마도 집단학살의 가장 흔한 동인은 군사적으로 강한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의 당을 차지하려고 하면서 그들의 저항과 맞설 때일 것"이라는 다이아몬드의 지적대로, 집단학살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곧 집단학살이 임의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자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자원을 확보하려는 행동의 결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회생물학의 민감한 이슈 가운데 하나인 강간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른 동물들에서나 인간에게서 강간이 유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진화적 적응 전략이라고 본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강간이 성적 욕망과 무관하며 단지 잔혹한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힘과 지배의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강간을 '자연적'이라고 여길 경우 강간범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만약 강간이 성적 욕망과 무관하다면 피해 여성의 분포는 살인 피해자의 연령 분포와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식력이 가장 높은 연령대에 집중돼 있다. "24세 여성이 강간을 당한 확률은 54세 여성이 당할 확률보다 약 4~20배 정도 높았다"고 보고된다. 강간이 성욕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통계다.

 

강간은 남성에게 진화한 심리적 기전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강간이 적응적인 조건부 전략이라는 가설에 따르면 강간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거나 처벌의 가능성이 낮은 조건과 관련성이 있다. 여성의 의지에 따라 짝을 맺을 가능성이 적거나 없는 남성에게서, 그리고 전투 중인 병사처럼 처벌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강간이 발생할 확률은 높아진다.

 

하지만 현재의 환경은 우리의 뇌가 진화한 환경과 다르며 강간 같은 행동이 유전자에 이익을 가져다줄 확률도 낮아졌다. 게다가 자주 오해받는 것처럼 어떤 행동이 '자연적'이라고 해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생물학이 어떤 행동을 진화적 적응 행동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좋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진화된 심리의 독재'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사회생물학의 승리>는 사회생물학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우리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훨씬 더 심화시켜준다. 교양학술서의 난이도를 갖고 있는 책이지만 "사회생물학의 내용과 역사에 대한 명쾌하고 유창하며 정확한 저작"이라는 에드워드 윌슨의 평가에 어긋남이 없다.

 

13. 05. 17.

 

P.S. 리뷰를 쓴 김에 번역본의 오류도 한두 가지 지적한다. 책의 장제목이나 절제목은 편집자의 판단에 따라 새로 붙여질 수 있지만(가령 9장의 원제는 '사회생물학의 실제 적용(The Practical Applications of Sociobiology)'이지만 번역본에서는 '인간과 사회생물학'이라고 붙여졌다) 9장의 첫 절 제목이 '집단학살'인 건 착오로 보인다. 그런 내용이 안 나올 뿐더러(집단학살은 7장 끝부분에 나온다) 원제는 '사회에 대한 위협(A Danger to society?)'이다. 번역도 한 군데 지적하면, 7장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말을 번역본은 이렇게 인용했다.

 

"진화적 관점이 도움이 되는 경우는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것에 대해서 뭔가를 가르쳐줄 때이다. 가령 학살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유발된다고 해도... 인류 역사는 결정론이 아니라 잠재적 가능성을 입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적 양식의 모든 특징이 결정적이기보다는 유연성을 보인다는 점을 통에서 우리는 학살과 같은 문화적 현상이 왜 진화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209쪽)

마지막 문장의 '통에서'는 '통해서'의 오자다. 처음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An evolutionary speculation can only help if it teaches us something we don't know already - if, for example, we learned that genocide was biologically enjoined be certain genes... but the observational facts of human history speak against determination and only for potentiality."(143쪽)
번역본은 강조한 if-절을 첫 문장과 분리해서 이해했는데, 내 생각엔 첫 문장에 이어지는 것이다. 굴드가 보기엔 집단학살이 특정 유전자에 의해 유발된다는 식이면 진화적 고찰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사는 결정론보다는 잠재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집단학살 유전자'가 집단학살을 유발한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게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굴드의 주된 이유인데(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면 사회생물학, 더 나아가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말해줄 게 없다고 그는 믿는다?!), 본문에서 지적한 대로 이건 굴드의 편의적인 이해이자 허수아비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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