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묵직한 주제의 한국사 연구서가 나왔다. 존 B.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너머북스, 2013). 저자는 1945년생으로 현재는 UCLA의 아시아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다. 영어권의 가장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옮긴이에 따르면 "저자는 타계하신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 제임스 팔레 교수를 이어 현재 해외의 한국사 연구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학자 중 한 분"이다. 팔레는 저자의 지도교수이기도 한데,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조선왕조의 본질과 기원에 관련된 기존의 여러 통설을 뒤집은 독창적이고 원숙한 업적이다." 

 

 

이미 에그워드 와그너와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저가 번역된 데 이어서 또다른 해외 한국사학자의 대표작이 소개됨으로써 한국사를 보는 우리의 시야가 상당히 넓어졌다.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너머북스, 2013)를 읽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기존 통설에 대해) 매우 도전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의 공력이 만만치 않으며 이에 버금갈 만한 국내 학자들의 업적으로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조선왕조의 고려적 기원'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인데, 학위논문을 쓰는 데 7-8년, 그리고 그것을 수정해 책으로 내놓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할 만큼 공을 들인 노작이다. 한국어판에 붙인 머리말에서 저자는 그사이에 한국사 연구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토로한다. 

그사이에 신흥 사대부설이 정설로 굳어졌고 한국 역사학계의 젊은 한국사학자들의 주된 관심거리는 고대사와 현대사로 옮겨갔다. 뿐만 아니라 어렵게 썼다고 하는 이 책의 원본은 영어가 비교적 짧다는 한국 전근대사 전공자들에게 읽고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행간을 들여다보자면 저자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신흥 사대부 조선 건국론에 정면에서 반박하는 게 자신의 핵심 논지이지만 그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다가 성과를 내놓는 바람에 '신흥 사대부설'이 아예 '정설'로 굳어져버렸다는 것(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논쟁적인 책이 출간된 다음에 사정이 바뀌었느냐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 전공자들이 이 '어려운 책'을 독해를 못해서 한국사학계에 별로 임팩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한국어판 번역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저자는 이런 바람을 덧붙인다.

이 책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통설인 신흥 사대부설에 정면 도전하는 연구로서 한국어판의 출간이 다시 여말-선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켜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대해 더 좋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겠다.  

이것은 비단 저자만의 바람이 아니라 나 같은 일개 독자도 갖게 되는 기대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출판사의 책소개를 참고할 수 있기에 여기서 길게 늘어놓지 않는다. 다만 핵심만 간추리면 이렇다.

이 책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핵심요지는 고려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고려의 중앙관료귀족이 지방의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한 기나긴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조선의 건국에 대해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 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한다.

 

나의 짧은 견문으로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서강대 정두희 교수의 전공분야가 조선 건국사였다. 지난 대선 즈음에 조선 건국사에 관심이 생겨서 구입해 좀 본 책이 <왕조의 얼굴>(서강대출판부, 2010)이었는데, 부제가 '조선왕조의 건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첫장이 '조선왕조 건국사에 대한 과거의 연구'인 만큼 당연히 던컨 교수의 책도 언급이 된다(국내 학자로서는 드물게도 저자는 영어권의 한국사 연구에 밝다).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의 저자 도이힐러(도힐러) 교수를 비롯한 구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소개하면서(여러 번 언급하지만 절판된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은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학자들은 고려-조선의 교체를 흔히 당-송의 교체와 비견해보는 경향이 있다. 도힐러 교수도 그러했으며, 던컨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던컨 교수는 사산조 페르샤나 고대 중국의 관료제를 검토한 아이젠슈타트의 The Political Systems of Empires를 크게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에 비해 그 지배지역이 무척 좁다는 점, 또 고려나 조선 두 왕조의 지배층이 모두 토지를 소유한 세습귀족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통사회는 중국과는 무척 달랐으며, 이 점이 한국 사회의 특징적 성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겸사겸사 아이젠슈타트의 <제국의 정치 시스템>도 번역되면 좋겠다...

 

13.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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