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 가득 쌓인 책 가운데 퍼트리샤 마이어 스팩스의 <리리딩>(오브제, 2013)이 손에 잡혀 펼쳐보았다. 사실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도피해보려는 심사였다(다른 책으로 도망가는 게 책에서 도망치는 거라니!). '예일대 영문과 교수'였던 저자는 20년 이상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교수이자 열렬한 독서가라고 소개되는데, 현재는 버지니아 대학 영문학과의 명예석좌교수란 직함을 갖고 있다. 찾아보니 이런 분이다.
<리리딩>은 저자가 은퇴한 후 소설 수십 권을 다시 읽는 1년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라고 한다. '다시 읽기'라면 나도 주종목이긴 한데, 이 프로젝트가 '은퇴자'만 시도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껴봄직하다. 아니 이미 시도했었지. 비록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가 원저 <리리딩>(2011)보다는 일년 뒤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다시 읽기가 왜 중요한가? <리리딩>의 부제대로 '깊이 읽기의 기술'이어서인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시 읽기를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간접적으로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는 아쉬움을 얼마간 상쇄해준다면 책은 충분히 다시 읽어볼 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그나마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책을 다시 읽는 건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소중한 일의 하나다.
다시 읽기는 인생을 다시 사는 한 방도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사는 방책이다. 아니, 우리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는 한 척도다.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책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물론 우리 자신이 달라진 것이다. 더 현명해졌을 수도 있고, 더 노회해졌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걸 확인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이 바로 다시 읽기다. 저자는 <죄와 벌>을 다시 읽은 경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젊은 시절 <죄와 벌>을 읽었을 때,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온몸으로 관습에 대항하는 대담무쌍한 젊은이로 보였다. 성인 독자가 된 후에는 바보 아니면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느껴졋다. 나는 그 소설을 다시 읽었다. 그는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동정적인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새로운 이유로 인해 그 작품에 매혹되었다.(9쪽)
그렇다. 그런 '매혹'이 언제든 발생하는 게 독서이고 다시 읽기다. <리리딩>의 경우엔 어린이책에 이어서 바로 '제인 오스틴의 문명세계'란 장이 이어지기에 저자를 검색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설득>에 관한 주석서를 갖고 있다. 아마도 오스틴 전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덧붙여서 <지루함: 심리의 문학사>, <프라이버시>, <소설의 시작> 같은 제목의 책들도 눈에 띄는데, 모두 흥미를 끄는 타이틀이다.
저자를 따라서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를 시도해봐도 좋겠다 싶은데, 마침 <오만과 편견>(을유문화사, 2013)도 새 번역본이 나왔다. '<오만과 편견> 새롭게 읽기'란 부제의 강의록 <제인 오스틴의 여성적 글쓰기>(민음사, 2012)를 펴낸 조선정 교수의 번역이다. 해설서로는 오정화 교수의 <오만과 편견>(신아사, 2010)도 참고할 수 있다.
세계문학전집본으로는 민음사판 외에도 펭귄클래식판과 시공사판으로 <오만과 편견>을 읽을 수 있다. 오스틴은 그간에 관심저자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책이 차곡차곡 쌓이니 일독해보고픈 욕심도 생긴다. 물론 <오만과 편견>만 읽는다고 하면 문제는 복잡하지 않지만 '제인 오스틴의 주요작'을 카바하려면 말 그대로 1년 계획은 세워야 한다. 흠, 섣부른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여기서도 적당히 빠져나가야겠다...
13. 0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