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사흘, 2013)은 이미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었는데, 책의 원서를 지난 주말에 받았다. 원서는 몇 종의 버전이 있는데(소프트카바는 두 종), 내가 고른 건 흰 바탕에 주유소 사진이 들어간 표지의 책이다.

 

 

암튼 다이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이지만(영어권에서는 상당한 명망가라고) 이 책 한권으로 자신이 수전 손택과 존 버거와 롤랑 바르트의 레벨이라는 걸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롤랑 바르트와 존 버거의 책에서 제프 다이어란 이름을 처음 접했다). 그런 만큼 독자로선 주의 깊게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부담도 있다. 낚시하다가 '물건'이 걸렸을 땐 신중하게 낚아올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에 관한 책인 만큼 많은 사진가들이 거명되는데, 일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작가들이다. 서두에 나오는 워커 에반스나 도로시아 랭이 그런 경우다(번역본에서는 '도로테아 랭'으로 표기됐다). 로버트 프랭크도 번역됐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다이어가 맨처음 꺼내는 화제는 사진집의 구성밥법 혹은 사진의 분류학이다. 가령 에반스는 자신의 작업구상을 정리하면서 '노동자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모든 계급의 사람들' '자동차들과 자동차가 있는 풍경들' 등의 목록을 설정한다. 다이어가 보기에 이런 목록과 비교되는 것이 루이스 하인의 사진집 <사회적, 산업적 사진들의 목록>이다. 하인은 '완전한 논리를 갖춘 엄격한 목록'을 구성한다. '이민자들' '일터의 여성 노동자들' 같은 주제어가 100가지가 넘고 그에 따른 하위 주제어가 800여 가지에 이르는 식이다.

그에 반해 에반스의 의도에 따라 구성된 목록은, 단일한 규칙에 의해 배열되고 조직된 목록이라고 보기에는 대단히 잠정적이고 우연적이며, 종국에는 지속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그밖의 많은 것들'이란 표현을 보라.) (14쪽)

이런 에반스가 1950년대에 친분을 쌓은 사진가 로버트 프랭크도 마찬기지였다. 프랭크는 자신이 찍을 사진들의 대상에 관한 목록을 이런 식으로 열거한다.

밤이 내린 도시, 주차장, 슈퍼마켓, 고속도로, 자동차 세 대를 소유한 사람과 한 대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 농부와 그의 아이들, 새 집과 기울어진 판잣집, 취향의 받아쓰기, 장엄한 꿈, 광고, 네온 불빛들, 지도자의 얼굴들, 그를 따르는 얼굴들, 가스탱크와 우체국과 뒤뜰들...(18쪽)

이런 분류는 바로 푸코가 <말과 사물>(영어본 제목은 <사물의 질서>)의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보르헤스를 떠올려준다. '어느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인용이라고 눙치면서 보르헤스는 이런 식으로 적었다. "동물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게 속한 것. (b)술에 취한 것. (c)훈련받은 것. (d)젖먹이 돼지들. (e)인어들. (f)훌륭한 것. (g)길 잃은 개들. (h)이러한 분류에 속하는 것들. (i)미친 듯이 몸을 떨어대는 동물들. (j)수를 셀 수 없는 것들. (k)낙타의 털로 만든 세밀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 (l)기타 등등. (m)지금 막 꽃병을 깨뜨린 동물들 (n)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동물들."

 

이 연상은 제프 다이어 자신의 것이다. <말과 사물>과 똑같게 <지속의 순간들> 역시 보르헤스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그러한 분류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은 내가 첫 번째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진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엄격한 방식 혹은 별나고 기이한 방식의 분류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들을 좋은 뜻에서 무작위로 배열한 이전 사진가들의 시도를 보며 용기를 내어본다."(11쪽) 그 이전 사진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는 이가 워커 에반스다. 에반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은 '무의식적 사진가들'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월트 휘트먼 같은 시인은 대놓고 사진을 찍는 쪽에 속한다.

 

 

그러나 월트 휘트먼은 자신의 시에는 무의식적인 요소가 없다고 단언했다. "<풀잎>의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 촬영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12족)

번역문만 보자면 "<풀잎>의 모든 것들은 문자 그대로 촬영되었다"는 말을 휘트먼이 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맥상으론 워커 에반스의 말이다. "In the case of Walt Whitman there was nothing unconscious about it."를 첫 문장도 "월트 휘트먼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인 게 전혀 없다"고 해야겠다. 휘트먼의 대표시집 <풀잎> 같은 경우, 에반스가 보기엔 말 그대로 사진 찍기다. 왜냐하면 "그는 가끔, 사진 관련 카탈로그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광고 문구처럼 읽히는 시"를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휘트먼 스타일이다.

...

보라, 힘차고 빠르게 달리는 기관차가 기적을 울리는 모습을.

보라, 농부들이 쟁기질하는 모습을.

보라, 광부들이 갱도를 파내려가는 모습을.

보라, 수도 없는 공장들을.

보라, 공구를 들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들을.

...

에반스가 이런 휘트먼의 시에도 영감을 받았다는 얘기. 제프 다이어는 루이스 하인보다는 그런 에반스와 로버트 프랭크의 작업방식에 호감을 느끼며 그의 사진책(<지속의 순간들>) 또한 그렇게 구성하려고 한다. 무작위적으로 보일 만큼 느슨하지만 정말 무작위는 아닌 어떤 배열 혹은 질서를 사진들에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사진집을 구성하는 더 감각적인 다른 방식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인의 방법론적인 접근과 비교하면 대단히 우발적이고 일시적이며, 종종 아무렇게나 시도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을 본보기로 삼았다.(19쪽)  

'더 감각적인 방식'은 'more sensible ways'를 옮긴 것인데,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맥락상으로도 '더 분별 있는 방식' 혹은 '더 합리적인 방식'을 뜻한다. 임의적이지 않은 방식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부정확한 번역으로 'these ... attempts'를 옮긴 것인 만큼 '이런 시도들'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워커 에반스와 로버트 프랭크 같은 이들의 시도를 가리킨다. 

 

이상이 저자가 말하는 대략적인 방법론(사진의 분류학)이라면 서론에서 또 하나 밝혀야 하는 것은 책이 다루는 대상이다. 물론 사진이지만 어떤 사진이냐는 것. "이 책은 주로 - 그러나 전적으로는 아니다 - 미국의 사진들을, 적어도 미국에 관한 사진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22쪽) 처음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사진을 탐구하는 에세이가 됐다는 것.

 

끝으로 이런 책을 쓸 자격. 흥미롭게도 제프 다이어는 사진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찍는 걸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내가 전문적이거나 진지한 사진가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카메라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는 여행객들이 부탁을 할 때뿐이다."(23쪽) 디카와 폰카 시대인지라 사진기 한 대도 안 갖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나 역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으니 저자와 공감하는 바가 있다(그러면서도 그는 사진책을 썼고 나는 읽는다!). 사진에 문외한이면서 사진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하지만 제프 다이어에겐 전력이 있다. 악기를 다룰 줄 모르면서 재즈에 관한 책을 쓴 전력이. 그건 핸디캡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사실은 장애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일종의 순수한 입장에서 사진이라는 매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내게는,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사진을 찍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1980년대 후반에 재즈에 관한 책을 쓰면서도 악기를 하나도 다루지 않았던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23-4쪽)  

그가 쓴 재즈책이 <그러나 아름다운>이고 이건 우리말로 번역중이라 한다. 인용문의 두번째 문장은 오역이다. 원문은 "I also have a hunch that not taking photographs is a condition of writing about them in the same way that my not playing a musical instrument was a preconditon for writing about jazz in the late 1980s."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1980년대 후반 재즈에 관한 책을 쓰는 데 전제조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 사진에 대한 책을 쓰는 조건이라는 예감도 든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재즈에 관한 책을 쓸 때는 참고할 만한 책이 거의 없었지만 사진에 관해서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다는 것. 그러면서 거명하는 이름이 수전 손택과 존 버거와 롤랑 바르트다. 그밖에 훌륭한 연구서나 에세이도 많고. "그러니 내가 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바(bar)가 높이 걸쳐져 있으니 나는 그저 그 아래서 자유로이 거닐기만 하면 되니까." <지속의 순간들>은 그렇게 하여 쓰이게 된 책이다.

 

 

'시작하며'라고 따로 분절된 <지속의 순간들>의 서두를 간추려보았다(원저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 사실은 페이퍼의 제목이 말해주듯, 제프 다이어가 쓴 영화책이 눈에 띄어 글을 시작한 것인데(겸사겸사 오역도 지적하고) 말이 생각보다 길어졌다(임시보관함에 넣어두면서 쓰기 시작한 게 일주일 전이다). 영화책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책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책 <조나>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스토커>)를 다뤘다는 것만 알고 바로 주문했다. 

 

 

<잠입자>에 대해서 한권의 책을 쓸 정도의 저자라면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주문한 책은 3월에 받아볼 텐데, 기대가 된다. <지속의 순간들>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제프 다이어는 올해의 첫 발견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13.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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