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며 지난주 시사IN(281호)에서 이성복 시인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최근에 나온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가 빌미가 된 인터뷰인데, 시인은 1년 전 대학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지금은 '한마디로 백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첫학기에 읽은 시집이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와 <남해금산>(1986) 등이었는데, 어느새 사반세기도 더 전이다. 시인도 이제 이순의 나이다. 그래서일까,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얼마 전 딸이 들려준 이야기라면서.

 

 

 

 

"마더 테레사 생전에 한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기도를 할 때 신께 무슨 부탁을 하느냐고. 대답하길, 부탁을 하지 않는다, 그저 듣는다고 했단다. 기도는 말하는 게 아니라 드는 거라고. 그러자 기자가 그럼 하느님은 뭐라고 말하느냐고 물었다.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도 듣는다고 답했다. 듣는 사람에겐 세상 전체가 자기 거라. 시도 듣는 거다. 시나 예술을 말하거나 표현하는 거라고 아는데 듣는 거다. 듣는데 개입할 수 없다. 다만 열려 있을 뿐이다."

시가 듣는 것이고, 시인의 귀가 열려 있으니 앞으로 시집이 더 자주 나올 수도 있겠다 싶다. 인터뷰 말미에 요즘 눈여겨보는 후배들이 있는지 물은 듯한데, 시인 서대경과 소설가 한강을 꼽았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문장이 좋다고. "어떤 개똥철학을 늘어놔도 문장만은 속일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라고 기자가 덧붙였다. 그래서 밥 먹으면서, 아니 이쯤이면 다 먹고 '서대경'을 검색해봤다(처음 들어본 시인이라).

 

 

처음 들어볼 만한 게 작년 여름에 첫 시집을 냈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문학동네, 2012). 그런데 특이하게 뜨는 책이 많다.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이 번역가를 겸해서다. 알고 보니 내가 전에 읽고 서평까지 썼던 조너선 색스의 <사회의 재창조>(말글빛냄, 2009)도 그의 번역이다. 그리고 눈에 띈 건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의 소설 <등에>(아모르문디, 2006). 출간시 전혀 주목하지 못했던 소설이지만 바로 관심도서가 됐다. 작가의 이력은 이렇게 소개된다.

1864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18세가 되던 해 베를린에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했으며, 1885년 런던으로 돌아와 유학시절부터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혁명 운동에 참여했다. 외국인 망명자들과 '자유 러시아의 친구들'이란 단체를 조직하여 회보 「자유 러시아」의 편집을 맡는 한편, 엘리노어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버나드 쇼, 윌리엄 모리스, 오스카 와일드 등과 교유했다. 제정 러시아치하 폴란드 출신의 망명가 미하엘 보이니치를 만나 결혼했으며,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1897년 소설 <등에>를 저술했다. 1920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이 때부터 저술보다는 작곡에 전념하여 여러 편의 칸타타, 오라토리오, 오케스트라 곡을 썼다. 다른 작품으로는 <등에>의 주인공 아서가 13년간 남미에서 보낸 유랑생활을 그린 <중단된 우정>(1910)과 아서의 증조모와 조모의 삶을 소재로 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1944)가 있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남편의 러시아 이름은 '미하일 보이니치'다. 보이니치의 이름은 '에텔 릴리안 보이니치'로 표기된다. 작가로선 댓 편의 작품을 썼는데, 대표작 <등에>는 1897년 미국과 영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이듬해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출판사 소개로는 이렇다.

오스트리아 점령하의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쓴 역사소설.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한 혁명가의 삶과 투쟁을 그렸다. '혁명적 로맨티시즘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으로, 혁명 운동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경험과 이탈리아의 독립.통일운동에 대한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씌어졌다.1897년 출간된 이래,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구 공산권 사회에서 큰 대중적 인기와 명성을 얻은 소설이다. 구소련에서는 1955년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작곡하고 알렉산더 페인짐머가 연출을 맡아 영화화되었고, 연극과 오페라로 각색되어 상연되기도 했다. 북한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자 스테디셀러로도 알려져 있다.

요컨대 '혁명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과거 사회주의권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란 애기다. 러시아에서도 아직 읽히고 있고, 클래식 문고본으로도 나와 있다(이 문고본은 6천원대 가격이다). 아래가 표지다.  

 

 

프랑스혁명기를 다룬 <레미제라블>에 열광하는 독자라면 이탈리아혁명을 다룬 <등에>도 읽어봄직하다. 나부터도 당장 장바구니에 넣어놓았다(연휴가 끼어 바로 주문할 수 없기에).

 

그래서 이야기가 이성복 시인에게서 에델 보이니치까지 흘러왔다. 서대경 시인을 잠시 건너 뛰었는데, 표제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공장 지대를 짓누르는 잿빛 대기 아래로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고철 더미가 깔린 비탈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사내는 담배를 물고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다 한쪽 팔이 잘려나갔는지 작업복의 빈 소매가 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사내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허공을 올려다본다 바람의 거친 궤적이 잿빛 구름을 밀어내면서 거대한 하늘 위로 새파란 대기의 띠가 몇 줄기 좁은 외길처럼 파인다 사내는 서리가 앉은 허연 머리를 허공을 향해 한껏 치켜들고서 광인처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더듬더듬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단순한 이름들을, 추위로 가득한 대기의 이름들을 겨울, 거대한 하늘, 서리의 길, 춤춘다

러시아 추위가 찾아왔다는 요즘 공기는 차지만 깨끗하다. 같이 대기를 느껴봐도 좋겠다. 다들 백치가 되어...

 

13.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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