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혜나의 두번째 장편소설 <정크>(민음사, 2012)가 출간됐다. 2010년 <제리>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작가인데, 두 소설은 젊은 세대 루저들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작품해설을 청탁받고 쓴 글을 발췌해서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는 노희준의 <킬러리스트>(랜덤하우스코리아, 2006)에 이어서 아주 오랜만에(6년만이다!) 두번째로 쓴 해설이다. 제목은 '루저들의 초상과 정크 소설의 탄생'이라고 붙였다.

 

 

『정크』는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제리』로 등단한 김혜나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데뷔작 『제리』는 “21세기적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들에 대한 킨제이 보고서”(김미현), “충격적이고, 반도덕적인 소설”(박성원), “최근 한국 소설에 없었던 새로운 어떤 표정”(강유정)이라는 평을 심사위원들에게 얻었다. 『제리』를 이미 읽은 독자라면 『정크』에서도 여전히 루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여전히 새로운 어떤 표정이지만 이제 조금은 낯을 익히게 된 표정이다. 그 표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김혜나의 ‘보고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제리』와 『정크』를 연속선상에 놓고 살펴보기로 한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의 한 경향으로 ‘루저 소설’을 지목할 수 있지만 김혜나의 소설은 또 다른 영역을 개척한다. 생활 속의 잡동사니나 망가진 기계 부품 따위를 이용하여 만드는 미술을 일컫는 ‘정크 아트’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녀의 소설들은 ‘정크 소설’로 분류해도 좋으리라. 아니, 작가는 자신만의 정크 소설을 적극적으로 발명하고자 한다. 폐물 혹은 쓰레기를 뜻하는 ‘정크’를 두 번째 소설의 제목으로 가져온 것도 그렇지만, 『제리』의 주인공 ‘나’ 역시 자신이 “늘 뭐 하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아였고 인간쓰레기였다.”(106쪽)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의식의 근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서울도 아닌 인천의 2년제 대학 야간반에 재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간 처지라는 게 그 열패감의 사회적 바탕이고 현실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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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두 번째 장편소설 『정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응답이라도 하듯이 주인공에 대한 호명으로 시작한다. “성재는?” 그것도 ‘아버지의 목소리’다. “그 소리에 나는 서랍장 안에서 랏슈를 꺼내려다 말고 그만 서랍을 닫았다.”(7쪽) 나(성재)의 행동을 제지한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부권적 권위를 갖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이 집’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들르는 첩의 집이고 성재는 ‘첩의 자식’이다. 그가 집에 찾아올 때마다 일성으로 “성재는?”이라고 묻는 것은 “나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물음”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성재는?”이라는 호명은 대상을 주체로 소환하는 호명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는 호명이다. 즉 존재를 부재로 전환ㆍ전락하는 물음이다. 더불어 그 호명 행위 속에서 아버지 역시 아들처럼 지워진다. 아버지에게 성재는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존재이고, 성재에게도 아버지는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존재다. “그는 나에게,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절대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적조차 한 번도 없었다.”(10쪽)라고 성재는 말한다. 그래서 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남겨 놓고 가는 몇 만 원의 돈으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매달 두고 가는 30~50만 원이 아버지의 ‘흔적’이다.


『정크』의 화자인 성재는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성애자(게이)다. 일부 과학계에서 동성애 유전자를 얘기하듯이 동성애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해명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성재의 경우는 심리적 동기가 얼마간 부여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엄마의 화장대 앞에 앉기를 좋아한 그는 “못난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 줌은 물론 나에게 부족한 부분이나 없는 부분까지도 메워 주는 것이 바로 화장(12쪽)”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못나고 뭔가 부족한 존재라는 인식이 그의 성(性)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결여하고 있는 핵심은 아버지의 부재다. “나에게 아버지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67쪽)라고 그는 말한다.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 태어났기에 그는 어머니와 성이 같다. 그리고 일찍부터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용이나 패션, 메이크업 그리고 남자와의 연애뿐이었다.”(33쪽) 그의 남자와의 연애 욕망은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재에게 자신의 결여를 채울 수 있는 방식은 화장을 통해 다른 존재로 변신하거나 마약을 통해서 자신을 망각하는 것, 두 가지다. 마약에 도취하게 되면 잠시나마 “첩 자식으로 살아온 이십여 년간의 시간도, 노래방에 나가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 하루 종일 방바닥에 누워만 있는 엄마도, 일주일에 두 번씩 집으로 찾아와 돈만 놔두고 떠나가 버리는 아버지라는 사람도, 그토록 매달려 왔던 화장도, 그토록이나 매달려 왔던 화장으로 취직조차 할 수 없는 현실도, 그래서 결국 싸구려 화장품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 현실도 모두 잊어졌다.”(112쪽) 자신의 현실을 잊어야만 겨우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성재의 역설적 현실이다. 하지만 마약이 궁극적인 선택이 될 수는 없다. 성재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형민은 물뽕을 마셔야만 겨우 살 것 같다고 말하던 친구였지만 결국 약물 과용으로 죽고 만다. 그것이 성재의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


성재의 중요한 또 다른 선택지는 ‘민수 형’과의 사랑이다. 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통해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있어서 완전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성재는 꿈꾼다. 같은 동성애자인 민수 형은 바로 그 ‘남자’로서 성재에 대한 욕망의 주체다. 아니 성재는 그가 그러한 욕망의 주체이기를 욕망한다. 성재는 나이가 다섯 살 더 많은 그를 스무 살에 만나 2년여를 사귀었다. 하지만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결혼하고 치과를 개업한 민수 형과의 관계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인다. ‘유부남에 애 아빠’까지 돼 버린 민수 형은 성재만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민수 형의 집을 찾아간 성재는 아빠 역할을 하는 민수 형의 모습을 보면서 좌절한다.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돈을 놔두고 가는 것처럼 민수 형 역시 성재에게 뭔가를 계속 사 주려고 하지만, “왜 자꾸만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려고 하는 거야? 왜 나에게는 절대로 형 자신을 주려고 하지 않는 거야?”(148쪽)라는 게 성재의 마음속 원망이다. 성재는 민수 형 자신, 곧 그의 모든 것을 원하며, 그의 모든 것이 되고 싶어 하지만, 민수 형은 더 이상 성재에게 성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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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민수 형과의 사랑도 선택지가 될 수 없다면, 절망의 끝에 놓인 성재에게는 어떤 탈출구가 있을까? 사회적 루저이면서 동시에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들러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하는 성적 소수자에게 어떤 희망이 가능할까? 작가는 두 가지 가능성 혹은 시도를 제시한다. 하나는 취업이라는 현실적 가능성이다. 길거리 화장품 가게의 아르바이트 직원이 아닌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취업하는 길이 성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하지만 메이크업 아티스트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도 시간제 아르바이트조차 겨우 구한 것이 그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내던져 버릴 수는 없기에 그는 악착같이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한다. 취직을 해야만 남의 남편이 되어 버린 민수 형과도 정말로 헤어지고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다. 그의 바람은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바라지 않고 그저 나 자신으로서의 일에 충실할 수 있도록, 충실해질 수 있도록 내 나름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 나가고 싶은 것뿐이었다.”(214-215쪽) 그런 바람을 그는 이룰 수 있을까.


그러한 현실적 가능성이 계속 유예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성재의 환멸과 고통은 깊어 간다. “아버지가 있지만 내 아버지가 아니고, 애인이 있지만 내 애인이 아닌 것”이 그가 들고 있는 인생의 패다. 아버지는 “번듯한 가정, 떳떳하게 장성한 두 아들과 멀쩡한 부인 그리고 첩으로 둔 엄마까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고, 민수 형도 “번듯한 직업과 돈 많은 부인, 그녀를 꼭 닮은 딸, 거기에 오래된 애인인 내 마음”(224쪽)까지 갖고 있었지만 유독 자신만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거지 같은 꼴’로 살아가야 하고 모든 걸 남들에게 구걸해야 했다. 삶의 단 한 순간도 더는 견딜 수 없는 처지에서 성재가 새로운 탄생을 고안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정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그가 기억의 형식을 통해서 토로하고 있는 새로운 탄생에 대한 열망이다. 

 

오래전, 어머니의 몸을 찢고 나오던 순간에도 나는 이토록이나 강렬히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잘 움직일 수가 없었고, 나는 내 존재가 쏟아 내는 모든 힘을 다해, 손가락부터 움직여 나갔다. 다음에는 발가락을, 그다음에는 발을, 그다음에는 손을 움직였다. 나는 살고 싶었다.(232쪽)

 

탄생 장면은 물론 기억거리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기억이 아니라 투사다. 성재는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과 존재의 결핍을 화장을 통한 변신으로 극복해 보려고 해 왔다. 그렇다면 존재의 ‘리셋’으로서 재탄생은 가장 적극적인 자기 변신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 아닐까. 이러한 기억/투사 이후에 성재는 민수 형에 대한 사랑이 오직 자기 안에만 존재하던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고 자문한다. “내가 그토록이나 바라고 또 기대던 민수 형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깨달음은 『정크』 역시 『제리』와 마찬가지로 성장소설의 의미를 갖게끔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따라서 서사적인 필연이다. 화장장에서 성재는 민수 형과도 과거의 자신과도, 그리고 이제 아버지와도 작별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를 통해서 거꾸로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정크』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부르는 주인공의 고투, 존재를 위한 고투를 그리고 있다고 말해도 좋겠다. 어떤 이들에게 존재는 자연스러운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무시, 그리고  자기 비하와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서만 간신히 얻어 낼 수 있는 자격이다. 김혜나의 정크 소설들은 이 시대 사회적 루저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동시에 정크들의 존재론을 제시한다. 작가의 고투와 함께 한국 소설의 영역이 좀 더 확장되었다.

 

13. 01. 23.

 

 

 

P.S. 중앙일보의 인터뷰기사(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664/10478664.html?ctg=1700&cloc=joongang%7Chome%7Cnewslist1)에서 작가의 요가 사진을 가져온다. 요가 강사도 겸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예술' 수준인 줄은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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