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작가가 읽어주는 세계문학' 꼭지의 청탁을 받고 쓴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고른 작품은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문학동네, 2010)이다. 다른 번역으론 <구덩이>(민음사, 2007)라고 나온 작품. 올해는 장편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2)와 단편집 <에피판의 갑문>(문학과지성사, 2012)도 번역되었기에 플라토노프 독자들에겐 기념할 만한 해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면 이 러시아문학의 거장이 '올해의 발견'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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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한국 독자들에게 비교적 낯선 이름이지만, 러시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반혁명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체벤구르』(1929)나 『코틀로반』(1930) 같은 대표작들이 작가의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틀로반』만 하더라도 1987년에 이르러서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분위기를 타고 문학잡지 『신세계』를 통해 처음 발표된다. 하지만 그렇게 소개되기 시작한 플라토노프는 가장 중요한 20세기 러시아 작가의 한 명으로 재평가된다. 20세기 러시아문학사의 가장 극적인 반전 가운데 하나라고 할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본명은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클리멘토프이다. 클리멘토프가 성이고 부칭인 ‘플라토노비치’는 그의 아버지 이름이 ‘플라톤’이란 것을 뜻한다. 그 부칭을 성으로 만든 게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라는 필명이다. 자연스레 철학자 플라톤을 연상시키는데, 우연찮게도 그는 가장 철학적인 작품을 쓴 20세기 작가에 속한다. ‘20세기의 도스토옙스키’란 평판도 무색하지 않다. 다만 도스토옙스키가 사회주의 이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데 반해서 플라토노프는 현실 사회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사회주의 이념에 투철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실제로 반혁명주의자이자 부농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을 때 플라토노프는 스탈린과 고리키에게 쓴 편지에서 “저는 계급의 적이 아닙니다. 노동자 계급은 저의 고향이며, 저의 미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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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플라토노프식 이상적 사회주의란 어떤 것인가. 『코틀로반』은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노동자들이 기초공사용 구덩이를 파는 이야기와 그들이 부농을 척결하는 데 동원되는 이야기.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말은 ‘스탈린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이 시작되는 시기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1921년까지 러시아는 혁명군과 반혁명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의 전장이었다. 이로 인해 피폐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레닌은 한시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이 신경제정책(네프)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1929년부터 중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농촌 집단화)를 핵심으로 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다. 농업 집산화란 간단히 말하면 집단농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부농척결을 명분으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고,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플라토노프는 이 과정을 직접 목격한 작가로, 『코틀로반』은 그 목격담이자 증언담으로도 읽을 수 있다.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코틀로반』은 노동자 보셰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서른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작업시간에 자주 사색에 빠진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되는데, 단지 자기 앞가림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삶의 계획’에 골몰하느라 그랬다. 모두가 당신처럼 사색에 빠진다면 일은 누가 하느냐는 공장위원회 측의 질문에 그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답한다. 그는 몸이 편하고 불편한 것에는 개의치 않지만 진리가 없다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노동자 사프로노프는 생의 아름다움과 지성의 고귀함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보잘것없고 사람들이 우울한 비문화적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해한다. “어째서 들판은 저렇게 지루하게 누워 있는 걸까? 5개년 계획은 우리들 안에만 들어 있고, 온 세계에는 진정 슬픔이 가득한 건 아닐까?”라는 게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이런 노동자들이 모여서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용 구덩이를 판다. ‘코틀로반’은 그 구덩이를 가리키는 러시아어다. 이 공사의 책임자인 건축기사 프루솁스키는 거대한 공동주택을 고안해낸 인물이지만, 정작 거기에 살게 될 사람들의 정신구조에 대해서는 느낄 수도,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고도 생각지 않으며, 그에게 삶은 희망이 아니라 인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프루솁스키 한 개인의 한계가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공동주택’에 거주하게 될 사람들의 의식과 생각, 관념 따위, 곧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영혼’에 대해서 사회주의를 건설중인 노동자들은 가늠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무지도 가난과 배고픔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심각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유예된다. 이것이 이행기의 딜레마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정치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져야 그 위에 사회주의적 의식, 즉 상부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에는 그 상부구조의 토대가 미처 형성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사회주의를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 그 토대가 형성되지 않아 사회주의 의식도 없고 영혼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말하자면 『코틀로반』에서처럼 ‘전(全)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로 구덩이만 파놓은 격이다. 사회주의적 정신, 사회주의적 영혼이란 게 아직 없으니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그래서 갖게 되는 정서가 슬픔과 연민이다.
보셰프는 이렇게 말한다. “슬픔이란 건 별게 아니오. 뭐가 슬픈 거냐 하면 온 세상을 지각하는 거는 우리 계급인데 행복은 여전히 부르주아의 몫이라는 거요. 행복은 수치심으로 이어질 뿐이오.” 곧 사회주의자를 위한 행복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미래의 몫이다. 고아 소녀 나스탸는 바로 그 미래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코틀로반』은 비극적이게도 나스탸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는 공산주의가 아이들의 느낌 속에, 또렷한 인상 속에 있지 않다면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진리가 곧 기쁨이며 약동인 작고 순진한 아이가 없다면 삶의 의미와 전 세계의 기원에 관한 진리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필요하단 말인가?”라고 플라토노프는 보셰프의 눈을 빌려 묻는다. 유감스럽게도 현실 사회주의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12.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