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아침에 현직기자들의 책을 손에 들었다. 서화숙 한국일보 선임기자의 칼럼집 <민낯의 시대>(클, 2012)와 임지선 한겨레 기자의 <현시창>(알마, 2012)이다. 기자가 저자라는 점 말고도 공통점이라면 제목의 의미를 책을 들춰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는 점(현시창이 '현실은 시궁창'의 준말이라고).

 

 

<민낯의 시대>에서 저자가 던지는 물음은 사뭇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도 한다. "왜 어떤 나라는 점점 더 발전하고 어떤 나라는 멈추고 어떤 나라는 심지어 뒷걸음치기까지 하는 걸까." 이런 물음을 갖게 한 것은 물론 최근 5년간 벌어진 뒤걸음치기,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최근 5년 사이에 한국 사회는 다시 뒷걸음치고 있다. 그것도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에 의해 민간인 사찰이 일어나고 자유로운 언론활동이 수사대상이 되고 최고권력층의 불법이나 탈법은 검찰이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위공직자들의 도덕 수준은 불법과 탈법이 일상이 되어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걸러지지 못할 정도로까지 떨어졌다. 김영삼 정부(1993-1998) 때 대통령 아들을 구속 수사할 수 있었던 검찰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 불법이 드러난 아들에 대해 서면질의로 수사를 덮었다. 북한 또다시 가장 위험한 적이 되었다.(5-6쪽)

저자가 압축해놓은 대로 권력층의 불법과 탈법이 일상적이다 보니 더이상 '자극'이 되지 않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개탄할 만한 현실이지만 저자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가치전도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역사발전의 디딤돌이 될 거"라고 믿어서다. "겉으로는 공동체 중심을 지향한다고 말하고 글 쓰지만 실제 삶은 자기 이해관계에 빠져 있던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게 오히려 잘됐단 것이다. 왜 그런가.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공익을 표방한 이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논의들이 쳇바퀴만 돌았던가. 그러니 모두가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진짜 논의가 가능해진다. 한국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민낯을 드러내는 과정은 뼈아프지만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로 인해 삶과 말이 일치하는 진짜 지식인, 진짜 지도자들도 모습을 드러낸다.(7쪽)

그것이 '민낯의 시대'가 갖는 의의다. "누구든 어떤 집단이든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옳을 때에만 옳다고 해줄 시대"가 바로 민낯의 시대다. 더이상 가면을 쓰지 않으니 가면에 속을 염려가 줄어든 시대. 하지만 낙관은 아직 이르다. 저자는 2009년 2월 12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쓴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부동산 투기를 하고 편법 증여를 받고 논문 조작을 하는 맨얼굴이 다 드러났는데도 이들을 정부각료로 내세우는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각료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낸 세금으로, 국가 전체를 위해 일하라고 기용되는 사람들이다. 추악한 맨얼굴이 드러났는데도 각료로 기용하는 것은 범죄행위임을 이명박 정부는 알아야 한다.(90쪽)

하지만 우리도 이젠 안다. 그걸 알 만한 정부라면 이명박 정부가 아니다. 아니 아무리 범죄행위라 하더라도 "그게 어때서?"라고 대꾸하는 게 이명박 정부다.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하는 건 'MB의 추억'(http://www.youtube.com/watch?v=eqr0QyOywbo)과 함께 'MB의 교훈'일 뿐이다.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런 시대를 한번 더 반복해서 살게 될 것이다.

 

 

<현시창>은 한겨레21의 '인권OTL' 시리즈로 이름을 떨친 임지선 기자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마주친 내 또래 청춘들에 관한 기록"이다. 사회부 기자의 취재거리가 될 만한 청춘이라면 대충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막다른 길로 내몰려 살인을 하거나 자살하게 된 청춘들이다. "노동, 돈, 경쟁, 여성" 등의 키워드가 이들 청춘의 고통을 집약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데 취직한다는 학벌사회, 초등학생들까지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경쟁에 미친 사회, 자존심도 인권도 포기한 채 일하길 강요하는 직장문화,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해야 하는 후진적 노동환경, 돈이면 다 된다며 상위 1퍼센트의 품격을 만끽하라는 물질만능사회, 남편과 아버지가 폭력을 휘둘러도, 직장 상사가 성희롱을 해도 도움받기 어려운 가부장제 사회에서 청춘 개개인은 고통받고 있다.(6쪽)

그래서 나온 푸념 혹은 절망이 '현시창'이다. 절망에 빠진 청춘들에 대한 위로는 요즘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필요한 게, 더 중요한 게 현실의 직시라고 본다.

너무 많은 이들이 청춘을 위로하고 치유한다고 나서는 세상이다. 나는 스물네 건의 사연을 내보이며 이래도 세상이 이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넬 수 있겠냐고 반문하려 한다. 이것은 철수와 영희,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나 혼자 잘살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청년이 미래에 대한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사회는 '나쁜 사회'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7쪽)

두 여성 기자의 칼럼집과 보고서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 '민낯의 시대'와 '시궁창 현실'을 직시하게끔 한다. 변화는 그 이후에 가능하다고 그들은 믿는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12. 11. 04.

 

 

 

P.S. 기자들의 책을 언급하다 보니 최근 시사IN 기자들이 다시 펴낸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시사IN북, 2012)이 생각난다.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 2007) 이후 어느새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창간과 관련한 비밀스런 이야기들과 취재 과정의 뒷담화가 넘쳐난다. 눈물도, 웃음도 있다."고 소개된다. 올해는 사옥도 이전했다고 하는데(주진우 기자의 공이 크다고 들었다) '진짜 언론'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