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8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분량상 지면에서 빠진 문장의 일부를 되살렸다). 여름다운 무더위에 독서 의욕도 떨어지는지라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좋을 듯싶지만, 정작 손에 든 책은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 2012)이었다. '방콕 여행자'들을 위한 책인데, 덕분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해 관련서만 또 여러 권 주문했다. 의욕은 떨어지는데, 책은 점점 더 높이 쌓아두는 심리라니...

 

 

 

주간경향(12. 07. 31)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을 손에 들 독자의 대부분은 피에르 바야르의 전작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은 독자일 것이다. 저자의 책이 연이어 번역되고 있지만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아무래도 그의 대표작이면서 제목 또한 직접적인 연관성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 그 ‘논리적 속편’이라고 말한다.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저자는 “어떤 주제에 대한 우리의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무지가 반드시 그것을 일관성 있게 논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세계를 좀 더 잘 아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그가 자주 드는 사례는 무질의 소설의 <특성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도서관 사서다. 이 사서는 너무도 방대한 도서관 책들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 역설적으로 어떤 책도 펼쳐보지 않으며 단지 카탈로그만 읽는다. 책을 읽게 되면 그 한 권에 대한 이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총체적 시각을 잃게 되니 그의 ‘비독서’는 전략적인 선택이면서 독서의 한 방식이다. 


여행에서 이러한 비독서가에 해당하는 것이 비여행자, 곧 ‘방콕 여행자’다. 방에 틀어박혀 여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여행이 공허하기 때문에, 보들레르의 시구를 빌면 “여행에서 얻는 앎은, 쓰라린 앎이어라!”는 인식 때문에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여행을 위해서 반드시 신체를 이동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방콕 여행자의 상징적 인물이 바로 철학자 칸트인데, 알다시피 그는 단 한 번도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지만 각종 여행담의 열혈 독자였다. 그가 여행할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나라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자의 관심은 자신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들을 세세하게 묘사한 작가들을 향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다. 서양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의 일상과 풍속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유명하지만 정작 그가 직접 중국을 여행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된 형편이다. 중국 문헌에 그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없고, 그의 견문록에 만리장성이나 전족에 대한 언급도 빠져 있어서 진짜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객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집적해놓은 책이란 가설도 나와 있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여행과 비여행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입장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동반견문록>이 여행기에서 픽션이 갖는 능동적인 몫을 되새기게 해준다고 재평가한다.

 

 


그러한 재평가는 다양한 사례에 적용될 수 있다. 사모아족 청소년들의 자유분방한 성 풍속을 소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경우도 실제로는 사모아족 마을에서 단지 열흘간 체류했을 뿐이고 그녀의 주장 대부분이 젊은 아가씨들의 간접적인 증언에 의존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정보원들의 성적 환상을 사모아족 성 풍속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참여적 관찰에 대한 강조 역시 착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비판한다. 일단 직접적인 관찰은 물리학이나 역사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이해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또 탐구 주체의 존재 자체가 탐구의 장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참여 관찰법은 간과한다. 상상력과 글쓰기의 힘에 대한 몰이해도 참여 관찰론자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반대로 바로 그런 근거에서 ‘원거리 관찰’은 옹호될 수 있다.

 


이 원거리 관찰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2003년 기사 표절 스캔들을 일으켰던 뉴욕타임스의 기자 제이슨 블레어이다. 다른 신문의 기사 일부를 표절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지만 알고 보니 그의 현장 취재기사 대부분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성된 것이었다. 피에르 바야르는 기자로서의 직업윤리를 위반한 점만 제쳐놓는다면 이 경우도 과연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성찰하게 해준다고 평가한다. 휴가철 방콕 여행자들에게 위로와 영감을 전해주는 책이다.

 

12. 0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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