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지난달인가 페이퍼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는데,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의 번역 한 대목을 문제 삼았다. 1998년에 나온 1쇄와 2010년에 나온 신장판 8쇄를 나는 갖고 있는데, 번역은 아무런 교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개역판이 나오면 좋겠다. 니체 관련서로 고명섭의 <니체 극장>(김영사, 2012)은 근래에 나온 가장 강렬한(그리고 무거운) 책인데, 들뢰즈의 니체 해석, 특히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도 하다(이만한 규모의 국내서는 백승영의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책세상, 2005)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일독해보시길.
한겨레(12. 07. 14) 신은 하나라고? 니체가 배꼽 잡네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내가 신이 되지 않고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상식대로 ‘신의 죽음’은 니체의 이 대표작에서 ‘초인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신들은 어떻게 죽은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를 읽은 독자라면 기억할 만한 대목이다. 그들은 웃다가 죽었다.
오래전 어느 날 분노의 수염을 한 어떤 신이 가장 무신론적인 말을 내뱉었다. “오직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다른 모든 신들이 깔깔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쳤다.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신성함이 아닌가?”(펭귄클래식)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일이 아니겠는가?”(한길사)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민음사)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가지 번역을 나열한 것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서는 이 대목이 좀 다르게 번역됐기 때문이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지 않건, 소위 그것이 신(성) 아닌가?” <차라투스트라>의 내용과 비교하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번역이다. 니체가 말하는 신성은 복수로서의 신들은 존재하지만 단수로서의 신, 곧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복수주의(pluralism)가 들뢰즈가 강조하는 니체 철학의 본질이다. 더 나아가 그는 복수주의가 철학의 고유한 사유방식이자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위대한 사건들’을 믿은 게 아니라 사건의 복수적 의미를 믿었다. 모든 사건과 현상, 말과 사유는 다수의 의미를 갖는다. 때로는 이렇고 때로는 저렇다.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헤겔은 복수주의를 순진한 의식과 동일시하면서 비웃었다. 마치 요랬다조랬다 하는 아이들의 미숙한 행태와 닮았다고 보는 쪽이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진리는 하나인 것이지 여럿이 될 수 없다. 그러한 헤겔주의에 맞서 들뢰즈는 사건이나 현상이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자 성숙함의 표지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본다는 것은 무게를 재고 가치를 평가한다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면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해석의 기술이 된다. 이 해석은 해석하는 자의 존재양태와 분리되지 않는다. 세상엔 고귀한 자가 있고 비천한 자가 있다. 인생은 바라보는 자에 따라서 희극도 되고 비극도 된다. 그것을 관통하는 단일한 보편성이란 없다. 칸트적 보편성을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로 대체한다.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의 거리는 제거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 서두에서 그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그러한 가치의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참된 비판을 수행하지 못했다. 니체 스스로 철학사를 니체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이유다.
12. 0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