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백년보다 긴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하루를 백년같이 산다면, 수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일은 일이고 가끔씩 '한눈팔기'도 불가피하다. 잠깐이지만 몇 페이지 책장을 넘긴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비채, 2012)인데, '바다표범의 키스'까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채소의 기분'은 어떤 건가 싶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첫번째 글이었다.

 

 

하루키가 실마리로 삼은 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란 영화에 나오는 앤소니 홉킨스의 대사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 없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골동품급 오토바이를 개조해 시속 300킬로미터를 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심히 펑키한 노인'으로 이웃집 남자아이에게 던진 말이 그렇다. 요컨대 '난 채소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채소를 면하는 일도 간단치 않다!).

 

 

 

'멋진 대사'이긴 하지만 그 정도를 인용하고 몇 마디 곁들였다면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남자아이가 이렇게 되묻는다. "그런데 채소라면 어떤 채소 말인가요?" 그러자 우리의 홉킨스 노인은 당황해서 "으음, 뭐 양배추 같은 거려나?"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이야기가 흐지부지 되는데, 하루키는 그 점이 맘에 들었다고. "나는 대체로 이런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해서, 이 영화에 호감이 생겼다." 그런 용두사미를 하루키 스타일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이제 하루키식 요리. 채소 이야기를 그는 마치 채소처럼 다룬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당연히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고 채소 요리를 즐긴다. 장에 가서 신선한 양배추를 고르면 어떻게 요리할까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그다.

세상에는 예쁜 아가씨를 두고 '자, 오늘밤은 이 아이를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기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남자도 적잖이 있을 테지만, 내 경우는 (대체로) 상대가 양배추이거나 가지이거나 아스파라거스가 된다. 좋든 싫든.

양배추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요리를 꿈꾸지만 양배추롤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카페를 경영하던 젊은 시절에 지겹도록 해먹어보았기 때문에 "양배추만큼은 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자, 이제 결론.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즉, 듣는 채소의 기분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 그래서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라는 멘트로 마무리한다. '우집다'란 말은 처음 본 단어인데 '남을 업신여기다'란 뜻이란다. 요컨대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 없다"는 분명 멋진 대사이지만, 동시에 채소 전체를 뭉뚱그려서 우집는 말인 만큼, '채소의 기분'도 고려하면 좋겠다는 얘기다.  

 

짧은 글이지만 하루키적 유머와 경쾌함이 묻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서문을 보니 책은 <앙앙>이란 잡지에 '무라카미 라디오'라고 한 해 동안 연재한 걸 모은 것이라 하고, 차례는 연재순이라니 '채소의 기분'이 제일 처음 쓴 글이겠다. 소설가에게 에세이란 어떤 것인가.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나는 이런 태도 또한 하루키 스타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라곤 해도, 그래서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써나간 글이라곤 해도 '제일 맛있는 우롱차', 제일 재미있는 글을 쓰겠다는 자세 말이다. 그 정도라면 읽어봄직하단 생각에(나는 하루키 애독자가 아니지만 <하루키 잡문집> 정도는 챙겨놓는다) '무라카미 라디오'를 더 찾아봤다. <무라카미 라디오>(까치, 2001)가 검색된다. 그러고 나서 '하루키 에세이'로 한번 더 검색하니 맙소사, 한 무더기가 이달에 나올 예정이다!

 

 

 

흠, <무라카미 라디오>와 중복되는 책이 필히 있을 듯싶어서, 주문하려던 걸 잠시 미뤘다. 뭐, 번역자가 다르다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하지만 재즈 에세이들에까지 손들 대려면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할 듯싶다. '채소의 기분'까지 고려하려고 하니 갑자기 읽을 게 너무 많아져버렸다!..

 

12. 07. 02.

 

 

 

P.S. 앤소니 홉킨스의 경우 <양들의 침묵> 이후의 필모그라피가 얼른 떠오르지 않았는데(<뒤로 가는 남과 여>란 영화 정도를 극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 <닉슨>!) 최근작 <휴먼스테인>을 보면서 다시금 '존재감'을 상기하게 됐다. 필립 로스 원작.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은 개봉이 안된 영화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