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322호)에 실은 서평을 약간 교정해서 옮겨놓는다. 지난해 7월 2일 세상을 떠난 출판평론가 최성일의 1주기 특집 가운데 <한 권의 책>(연암서가, 2011)에 대한 서평을 제안받고 쓴 것이다.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추모특집의 일부인 만큼 '인물평'도 겸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자와는 면식이 없는 터라 책을 통해 알게 된 저자의 면모만을 스케치해 보탰다.  

 

 

기획회의(12. 06. 20) 한 권의 책이 된 사람

 

두 권의 서평집을 낸 처지이지만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드문 경험이다. 그럼에도 고(故) 최성일의 <한 권의 책>(연암서가, 2011)에 대한 청탁에는 흔쾌히 응했다. 일종의 ‘의무감’이 작용했다고 할까.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지만, 최성일은 표정훈, 이권우와 함께 내게는 ‘선임’이다. 직접적인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얼 인수인계 받은 것도 아니니 ‘직계’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출판평론가’ 혹은 ‘도서평론가’로서 그들의 활동은 자못 눈부셨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책에 관한 모든 담론을 즐겨 읽었고, 자연스레 ‘3인방’의 이름도 내겐 친숙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쯤인가 지형이 조금 바뀌었다. 온라인서점의 블로그화와 함께 온라인 또한 서평활동의 주된 무대가 됐다. 사실은 인터넷 카페란 것이 생길 때부터 활동해온 터이지만 블로그 시대는 ‘인터넷 서평꾼’이란 직함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서평꾼이건 서평가이건 하는 일은 선임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가끔 생각해볼 때마다 전설의 ‘말년 병장’들을 떠올렸고, 나대로의 후임이 생기기를 기대했다. 이것이 서평꾼으로서 내가 갖고 있는 모종의 세대의식이다. 

 

 

 

그가 읽은 책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는다. 표정훈은 전역하여 ‘전직 출판평론가’가 됐고, ‘장기복무’를 자원한 두 사람 가운데 최성일이 지난여름 우리 곁을 떠났다(단연코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가 남긴 서평들을 모은 유고집의 제목이 <한 권의 책>인 것은 적확하면서도 시적이다. 출판평론가로서 그가 온전히 책과 함께 살았고 그의 생애 자체가 한권의 책으로 응축됐다는 인상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열정을 오직 책에다 바친 ‘순정남’은 아니었다. 야구광인 ‘야빠’이기도 했던 그는 소설가이면서 소문난 축구팬 닉 혼비의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를 평하는 자리에서 넌지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닉 혼비처럼 책이 재미있어서 읽는다. 그러나 책이 야구보다 재미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책은 고작해야 야구만큼 재미있다.”

 

나는 물론 야구보다도 책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의외의 고백에 ‘배신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유쾌하다. 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지론이니까. 최성일 버전으로 말하자면,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책이 야구만큼 재미있다면 거꾸로 야구도 책만큼 재미있을 테니까. 과연 그는 어떤 책들을 야구만큼 재미있게 읽고 어떤 소감을 남겼을까.

 

서평집의 용도는 보통 두 가지다.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내가 읽은 소감과 비교해보거나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정보를 요긴하게 챙기는 것. <한 권의 책>의 용도는 내게 단연 후자 쪽이다(장정일의 '독서일기'가 내겐 그렇다). 그가 고른 책의 3분의 1 가량은 나도 갖고 있지만 견주어볼 만한 서평을 쓴 건 한 권도 없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짧은 칼럼을 하나 쓴 정도다. 그러니 독서과정은 구입할 책, 읽을 책, 안 읽어도 되는 책으로 분류하는 자동분류기를 작동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책에 관해서라면 나도 남들만큼은 읽고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안다고 자부하는 쪽이지만, 최성일은 훨씬 더 넓은 안목과 오지랖을 자랑한다. 가령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 선생의 <밤의 일제 침략사>(한빛문화사, 2004)란 책의 존재를 나는 그의 리뷰 덕분에 알게 됐다. 물론 내가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던 2004년에 나온 책이란 사실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최성일은 20년 만에 다시 나온 이 책을 그 이전부터 백방으로 찾았던 전력이 있다. 책도 보려고 하는 자의 눈에 띄는 법이다. 그는 “일제는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는 핵심 어구와 함께 책이 전하는 내용과 미덕을 두루 살핀다. 일본의 화류문화를 조선에 이식한 이토 히로부미가 “게이샤 한 명에게 쌀 1천 가마에 해당하는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경의선 부설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에게는 하루 밥값도 안 되는 돈을 임금이라고 지급”한 사실은 허울 좋은 ‘식민지 근대화’의 이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책에서 마음을 읽어내다

수천이 넘는 장서 가운데 한권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손에 들겠다고 말하는 채광석 시인의 옥중서간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형성사, 1981)도 눈이 밝을 뿐 아니라 섬세한 마음결까지 지닌 출판평론가 덕분에 알게 됐다. 오래전에 절판돼 인터넷 서점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책이다(저자도 따로 서지를 적어놓지 않았다). ‘이 한 권의 책’이라고 꼽는 이유는 단출하다. “한 젊은이의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 배인 연애편지”라는 게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최성일은 노천희의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삶이보이는창, 2007)란 책에도 주목한다. “강제징집당한 학생운동 출신 졸병과 중학교에 갓 부임한 신졸 여교사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제대를 넉 달 앞두고 의문스런 죽임을 당한 남자와 그를 평생 가슴에 품은 여자의 사연을 최성일은 ‘우리 시대의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라고 부른다. 비무장지대 전방초소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군대 경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그가 책에서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라 ‘마음’도 읽어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남편의 유고집’에 그의 아내가 감동적인 서문을 대신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사달과 아사녀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니까. 아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귀가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옥아, 나 왔어. 야, 집이 최고다. 집이 제일 좋다니까!” 그러니 그가 순정남이 아니었다는 앞에서의 말은 교정돼야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책과 야구에 양다리를 걸쳤을지 모르지만, 그는 사랑에서만큼은 ‘순정남’이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내가 챙긴 책의 목록은 더 이어지지만 대표적으로 두 권만 들어보았다. 사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두 권의 책으로만 가지를 치더라도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서평집의 대표적 ‘민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서평을 읽는 것으로 읽은 셈 치게 되는 책도 적지 않으니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끝으로 오탈자는 물론 책에 관한 서지정보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기탄이 없었던 그의 교정정신을 기리며 한마디 보태자면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 서지에서 ‘김형익 옮김’(329쪽, 377쪽)은 ‘김병익 옮김’으로 교정돼야 한다. 물론 그가 직접 교정을 봤다면 걸러졌을 오류일 것이다.

 

12. 06. 24.

 

 

 

P.S. 지면에는 채광석의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의 서지가 청년사판(1986)으로 나갔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형성사판(1981)이 초판이어서 바로잡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고인의 1주기를 맞아 7월 4일 저녁에 북스리브로 홍대점에서 추모 북콘서트가 열린다. 개인적으론 강의 때문에 참석이 어렵지만, 저자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잊지 말고 참여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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