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토요판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두 종의 번역판으로 다시 읽고 오늘 아침에 쓴 글이다. 지면이 약간 개편되면서 다음회부터는 '번역' 문제를 좀더 다루게 될 예정이다.

 

 

 

한겨레(12. 06. 16) 오만이 부른 파멸…그때야 깨달은 ‘행복의 조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제목대로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딸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안티고네>는 안티고네만의 비극을 다루진 않는다. 오히려 초점은 외삼촌이자 테바이의 왕인 크레온에게 맞춰진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두눈을 찌르고 방랑길을 떠난 뒤, 그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놓고 서로 적이 돼 싸우다 둘 다 죽고 만다. 그에 따라 왕이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는 치르게 하되 적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의 장사는 허용하지 않는다. 원수는 죽어서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그의 금지에 맞서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한다. ‘국법’을 어기게 될지라도 그것이 가족의 도리이자 인륜이라고 생각해서다. 그걸 막을 권리가 크레온에겐 없다고 안티고네는 믿는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이러한 대립은 흔히 ‘가족의 법’ 대 ‘국가의 법’의 대립이라는 구도로 이해돼 왔다. 사적인 윤리와 공적인 법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명령을 어기고 오빠를 장사지내려다 잡혀온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포고보다 ‘신들의 법’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고, 크레온은 그런 안티고네를 오만하다고 비난하며 지하 동굴에 산 채로 가둔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얼핏 ‘동등한 권리를 지닌 두 원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크레온의 법에 끝까지 동의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은 필요하지만 모든 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크레온 자신조차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서 그의 처사가 신들의 분노를 살 거라는 충고를 듣고는 마음이 흔들린다. 죽은 자를 짐승의 밥이 되게 함으로써 또 죽이는 건 결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며 저승의 신들에 대해서도 불경한 폭력이라는 게 테이레시아스의 충고다. 자기의 고집을 꺾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자칫 자신의 오만이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크레온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아, 괴롭구나.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한 결심에서 물러서노라. 무리해서 필연과 싸워서는 안 되는 법이니.”

 

하지만 크레온의 회심이 그를 파멸에서 구하지 못한다는 데 <안티고네>의 비극이 있다. “국가는 지배자의 소유”이기에 도시 백성들의 뜻에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이 권력자는 결국 자신의 오만에 대한 무서운 대가를 치른다. 동굴 무덤에 갇힌 안티고네가 목을 매 자살하자 약혼자인 아들 하이몬이 분을 못 이겨 자살하고, 연이어 아들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아내 에우뤼디케마저 자살하고 만다.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게 된 크레온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탄식한다. 코로스의 말대로 그는 너무도 늦게야 올바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필멸의 인간에겐 뒤늦은 깨달음도 재앙을 피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의 운명은 보여준다.

 

‘안티고네의 비극’이라기보다는 ‘크레온의 비극’이라고 불러야 온당한 이 작품의 교훈은 무엇인가. 말미에서 코로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현명함은 행복의 으뜸가는 바탕이로다. 그리고 신들에 관해서는 아무것에도 불경스럽지 말 것이로다.”

 

12.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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