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필순에 변동이 있어서 오랜만에 쓰게 됐다. 아침신문에서 단연 톱기사로 다뤄진, 검찰의 불법사찰 재조사 결과발표에 대한 생각을 꼬투리 삼아 점심때 적은 칼럼이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한번 더 절감하게 해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12. 06. 15) 죽을 각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국민적 여론에 떠밀려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수사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밝힌 지 3개월여 만에 나온 결과다. 하지만 사찰의 진짜 몸통과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기대는 배반했지만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기대는 희망사항을 반영하지만 예상은 과거의 전력을 고려한다. 대한민국 검찰은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능하거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이 훨씬 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놀랄 건 없는 관련기사들을 읽다가 검찰은 대체 ‘사즉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보통은 ‘모든 것을 걸고’ 혹은 ‘죽기를 각오하고’ 임한다는 뜻 아닌가. 검찰 수사에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면 ‘사즉생’이란 말의 효과에 넘어간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정작 검찰은 ‘사즉생’이라고 말해놓고 ‘사즉생(詐則生)’이란 뜻으로 새겼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가. 두 대목이 떠오른다.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대사, 곧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아니면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까지 대적하여 끝장을 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이냐.” 대응관계로 보건대, 햄릿에게 산다는 것은 “성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견디는 것”이다. 반대로 죽는다는 것은 “고해의 바다에 맞서 끝장을 내는 것”이다.

 

햄릿에 견주어 보자면, 검찰에겐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 일단 죽기를 각오한다면 권력의 핵심에 맞서 끝장을 보는 일이 가능했겠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불법사찰 관련자를 모두 철저히 조사해서, 특히 청와대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해명하고 법에 따라 죄과를 묻는 것이 ‘끝장’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좌초된다 할지라도 검찰은 ‘국민의 검찰’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사즉생’이다.

하지만 검찰의 선택은 청와대 개입 의혹을 지우는 데만 죽기 살기로 매달려 결국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결과만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성난 여론의 돌팔매와 화살을 꿋꿋이 견뎌내는 것”을 택한 셈이다. 그것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으나 그 연명은 검찰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게끔 만들었으니 ‘생즉사(生則死)’와 다를 바 없다.

죽을 각오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대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온다. 한 사형수에 관한 에피소드인데, 그는 어느 날 아침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로 끌려가 총살된다는 선고문을 듣는다. 죄수들이 세 개의 기둥이 처형대로 놓인 사형장에 도착하고 첫 세 명의 죄수에게 사형복이 입혀진다. 세 번째 줄에 선 그에게는 이제 생의 시간이 5분 정도밖에 안 남았다. 하지만 그는 이 5분 동안 ‘많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동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동료들과의 작별에 2분,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데 2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데 남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한다. 불과 수분 후에 들이닥칠 죽음과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던 그는 만약 자신이 다시 살게 된다면 “매 순간을 1세기로 연장시켜 아무것도 잃지 않고, 1분 1초라도 정확히 계산해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다. 그런 상념 끝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총살되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갖는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바로 다음 순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면령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정치범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면됐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체험이 반영된 이 이야기는 임박한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삶의 시간이 얼마나 확장되고 그 가치가 얼마나 고양될 수 있는지 말해준다. 석 달의 시간을 허비한 검찰이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이다.

 

12.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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