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전문지 공간(53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 철학자 슈스터만의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미 소개된 책들과 함께 언제 통독해보면 좋겠다.

 

 

 

공간(12년 6월호) 삶의 미학

 

<프라그마티즘 미학>과 <몸의 의식>이 국내에 소개됨으로써 이름을 알린 미국 철학자 리처드 슈스터만의 새로운 책 <삶의 미학>(이학사, 2012)은 제목보다 ‘예술의 종언 이후 미학적 대안’이란 부제가 먼저 눈길을 끈다. ‘예술의 종언’론에 대한 비판과 ‘미학적 대안’의 제시가 저자의 주된 관심사라는 걸 시사해준다. 예술의 종언이란 무엇이고 가능한 미학적 대안이란 또 무엇인가.


예술의 종말에 대한 주장은 19세기초 헤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에서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예술이 더 고차원적인 단계에 그 역할을 인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일종의 바통터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고대의 예술과 중세의 기독교, 그리고 근대의 철학이 그렇게 정신의 역사라는 레이스의 주자들이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한때 예술에 형식적 힘을 부여했던 정신의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기독교를 거쳐 철학의 몫으로 돌려진다. 전성기를 지난 예술은 비록 계속 존속하더라도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곧 예술의 종말이다.


20세기 들어서 새로운 예술의 번성과 함께 잠시 주춤하던 예술의 종말론은 1930년대에 이르러 다시금 표명되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은 두 가지 종말론적 서사를 정식화하는데,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적 아우라의 쇠퇴를 가져옴으로써 예술이 가치의 숭고한 영역에서 물러나는 것이 종말의 한 양상이라면, 무질서한 정보의 범람 속에서 전통적인 미적 경험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또 다른 종말이다.


분석철학자로서 이러한 종말론에 가세한 이가 아서 단토이다. 단토는 헤겔주의에 입각하되 예술의 독자적인 역사를 해명하고자 한다. 무엇이 하나의 대상을 예술로 만들며 그것이 왜 예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예술사의 진화동력을 ‘미메시스’로 규정한다. 얼마만큼 닮았는가가 예술적 형상화의 발전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 복제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닮음을 발전의 척도로 간주할 수 없도록 만들며 이에 따라 예술은 자연스레 종말에 이른다.


역사철학적 관점과는 별개로 제도적 시각에서 예술의 종말을 주장하는 쪽도 있다. 예술을 특별한 사회 역사적 제도로 보는 시각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은 18세기에 처음 등장하며 근대성의 기획과 함께 강화되다가 포스트모더니티의 도래와 더불어 종말을 맞는다. 예술이 근대성의 산물인 만큼 근대성의 종언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슈스터만은 이러한 예술 종말 서사를 용인하지 않는다. 제한적으로 규정된 예술의 종말이 예술 전체의 종말을 의미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것이 미적 경험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속에서도 미적 경험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예술의 갱생 에너지는 다 소진된 것이 아니다. 폭넓은 미적 경험과 미적 가치 개념의 회복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다.  


슈스터만의 ‘프래그머티즘 미학’은 미적 경험이 근대성의 구획을 넘어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성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적 경험은 그 이후에도 가능하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단토의 예술종말론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비식별성’을 비판한다. 단토는 예술작품과 비예술작품, 곧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상품 브릴로 박스를 지각적 속성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적 경험은 예술을 적절하게 식별해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에 대한 정의는 ‘지각’이 아닌 ‘해석’의 몫이 되며 감성학으로서 미학은 이제 비평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단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슈스터만은 이 비식별성 문제를 대상이 아닌 주체에 적용해보자고 제안한다. 매우 강렬한 예술작품에 대해서 동일한 해석을 제시하는 두 명의 관람자가 있는데, 한명은 그가 보고 해석하는 대상에 전율을 느끼는 인간이고, 다른 한명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지각 정보를 처리할 뿐인 사이보그이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해서 사이보그가 예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면 핵심은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경험이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고양되고, 강렬하며, 유의미하고도 정감적인 경험”으로서 미적 경험을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때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거꾸로 미적 경험이 여전히 유효하며 계속 보존될 수 있다면 예술은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 저자가 인용한 T. S. 엘리엇의 말을 빌면, “종말은 또 하나의 시발점이다.”


바로 그러한 견지에서 슈스터만은 자신의 이론적 기획이 “순수예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적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예술과 삶을 더욱 밀접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미학적 대안은 ‘프래그머티즘 미학’과 ‘몸미학’이란 이름으로 이미 정식화돼 있으며 <삶의 미학>을 그것을 더욱 확장하려는 시도들을 담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에서 컨트리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의 도시미학에 대한 성찰에서 문화다원적 자기창조에 이르기까지 미학적 실천은 여전히 살아있다.

 

12.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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