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533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필립 카곰의 <나체의 역사>(학고재, 2012)를 서평거리로 삼았다. 잡지는 아직 받아보지 못해서 초고를 올려놓는다. 이 책의 흥미로운 서두는 이렇다. "이렇게 한번 해보라. 책을 덮고 당장 옷을 벗어라. 만약 지금 욕실에서 이 책을 읽으려 했다면 괜찮겠지만 하필 서점에 있거나 버스나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면 인생이 달라질지 모른다."

 

 

 

공간(12년 4월호) 나체의 역사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ed)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누드는 옷을 입지 않고 고의로 시선을 끄는 것을 말하며 네이키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말한다.” 즉 누드는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네이키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누드의 공간이 주로 예술가의 작업실이라면 네이키드의 공간은 욕실이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언제나 확연히 구분되는 건 아니다. 가령 대중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몸은 자기 자신을 위한 네이키드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누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립 카곰의 <나체의 역사>(원제 ‘A Brief History of Nakedness’)는 제목에 ‘네이키드’를 달고 있지만 누드와 구별되는 네이키드만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의미상의 논란을 막기 위해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하며 우리말로는 통칭 ‘나체’로 번역됐다. 이 나체가 어째서 관심거리인가?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나체는 왜 사람들을 그렇게 흥분시키는가? 왜 어떤 종교는 나체를 비난하고 또 어떤 종교는 권하는가? 나체 시위로 무언가 보람 있는 것을 이룰 수 있는가? 젖꼭지를 가린 재닛 잭슨의 가슴이 겨우 눈 깜짝할 동안 노출됐다는 이유로 CBS에 55만 달러의 벌금을 매기는 나라에서 어떻게 음경 연기자들이 자신의 생식기를 주무르는 공연을 할 수 있는가?” 등등. 이러한 관심에서 나체의 역사를 탐사해보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떤 목차를 구상할 수 있을까? 저자는 예상할 수 있는 경로를 비껴가지 않는데, 그가 고른 주제는 ‘종교와 나체’ ‘정치와 나체’ ‘대중문화와 나체’, 세 가지이다.  

 

저자에 따르면 나체와 종교가 최초로 결합한 사례는 4,000여 년 전, 인더스강 유역에 나타난 현인들로 이들은 옷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과 이들 나체 현인들과의 만남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런 기원이 우연은 아닌지 인도의 종교에서는 나체 수행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자이나교도들은 옷을 입지 않는 것을 ‘공기를 입는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자신이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은 사람’이란 뜻도 전한다. 현재 나체 자이나교 승려들은 200명이 채 되지 않지만 힌두교 나체 성자들은 아직 수천 명이나 있다. 인도의 나체 수도승 전통에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성적 편견과 나체 동기다. 남성만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게 나체의 역사 내내 발견되는 성적 편견이고, 자제와 금욕의 행위로 나체가 되려고 한다는 게 종교적 동기다. 나체 수도승들이 누군가를 유혹하려고 한다면 그 짝은 신이다.  

 

나체가 신에 더 가까이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이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은밀하게만 전해졌다. 가장 유명한 나체 기독교도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나체를 네 종류로 구분했는데, 원죄로 타락하기 이전의 자연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자연적 나체’, 가난하거나 자발적인 거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인 ‘일시적 나체’, 자신의 순결함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나체’, 허영과 육욕이 지배하는 ‘죄악의 나체’ 등이다. 나체를 옹호하는 자연주의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나체가 처음 세 종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에서 나체가 순수함, 수치를 모르는 상태, 더 나아가 육체를 거부를 뜻한다면 정치에서 나체는 강력한 힘과 권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취약성과 노예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즉 나체에 대한 이중적이고 모순적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정치영역이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군이 이라크 죄수들의 옷을 벗길 때 나체는 굴욕적이고 가학적인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정치적 시위를 목적으로 옷을 벗을 때 아무것도 숨길 게 없는 나체는 도발적이면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수단이 된다. 종교에서 남성의 나체가 특권적이었다면 여성의 나체는 정치 운동의 영역에서 주도적이다. 2005년 캘리포니아 멘도시노카운티에서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낸 채 일광욕을 하고 대중 앞에서 수유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브레스트 낫 밤(Breasts not Bombs)’ 운동을 펼쳤다. 이 활동가들이 외친 구호는 “가슴은 폭탄이 아니다. 유방은 탱크가 아니다. 젖꼭지는 네이팜탄이 아니다. 유방은 미사일이 아니다”였다. 인간은 나체일 때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시위하는 나체는 강하다. 이것이 나체의 역설적 본성이다. 때문에 나체는 정치적 주장뿐만 아니라 도덕적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나체 시위는 나도 과도하게 이용되어 진지한 캠페인이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대중이 나체 시위에 싫증을 내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미국에서 나체 활동가들은 여전히 소수자일 뿐이고,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최근에 들어와서야 나체가 시위의 수단이 됐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체 시위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인 만큼 나체의 정치성은 아직 고갈되지 않은 영역이다.

 

종교와 나체, 정치와 나체와 달리 우리에게 친숙한 건 대중문화와 나체라는 주제다. 나체는 언제나 관음증적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정치적 주장과 저항의 수단으로서도 유효하지만 그만큼 상품화의 수단으로도 유력하다. 1960년대에 나체 혁명을 일으킨 뮤지컬 <헤어>에서 나체 장면은 20초도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많은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등에서 나체가 등장하며 성적 자유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체는 이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제약받지 않고 세상에 존재할 자유’를 표현하는 행위가 됐다. <나체의 역사>는 벌거벗은 몸의 역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중요한 통로라는 걸 알려준다.

 

12.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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