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정 때문에 어제 오후 홍대앞 PC방에서 쓴 글이다. 아침에는 주진우의 <주기자>(푸른숲, 2012)를 읽다가 가방엔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를 넣어 갔었는데, 칼럼은 '책 읽는 뇌' 이야기에서 멈췄다. '중년의 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참이다.

 

 

 

경향신문(12. 04. 06) [문화와 세상]독서력을 갖춘 사회

 

책을 몇권 내면서 가끔 강연회에서 독자들을 만난다. ‘책에 대한 책’으로 분류되는 책들이다 보니 화제는 주로 독서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가 청중의 주된 관심사다. 그런 물음에 답하다 보니 애용하게 된 레퍼토리 중 하나는 ‘책 읽는 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목록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독서력을 갖추는 것이란 점은 자명하다.

 

무엇이 책 읽는 뇌인가. 기본전제는 인간은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 불과 5000년 전의 일이고 책이란 물건이 등장한 건 그보다 나중이니 독서능력이란 게 우리 뇌에 특별한 능력으로 자리 잡을 순 없었다. 그럼에도 문자를 해독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우리 뇌의 다른 기능들이 부수적인 역량을 발휘한 결과다. 그런 기능 간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난독증인데, 책 읽는 뇌가 우리의 본질적 능력이 아니라 ‘부업’의 결과라면 난독증이 큰 흠은 아니다. 진정 놀라운 것은 오히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부모라면 자녀들이 한글을 깨칠 때 느꼈던 경이감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우리 자신도 그런 경이감을 부모에게 안겼을 것이니 알고 보면 다들 ‘천재’였다. 비록 일반화되긴 했지만 문자를 읽어낸다는 것, 소위 ‘문해력’은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라 천재적인 능력이다.

문제는 문해력이 곧 ‘독서력’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능력은 글자를 읽거나 글을 읽는 능력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능력이다. 그리고 이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 대단한 노력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두 권씩 2년 정도의 단기간에 꾸준히 읽으면 된다. 그렇게 ‘10000페이지 독서’나 ‘150권 독서’를 통해서 독서력이 길러진다. 어지간한 책을 읽고 소화할 수 있는 힘이 독서력이다. 만약 어지간한 책을 읽어내는 게 힘겹다면 독서력이 아직 부족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책 읽는 ‘근육’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글을 읽는 단계에서 책을 읽는 단계로 넘어가려면 좀 더 단련된 뇌 근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된 뇌 근육은 독서의 지평뿐 아니라 세계의 질감 또한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문맹을 벗어난 사회가 문해력을 갖춘 사회라면 진정한 문명사회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일제시기 한국인의 70%가 문맹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문맹률에 있어서만큼 세계 최저 수준이니 우리의 초급 문해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문해력과 독서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문해력은 초등교육의 과제일 수는 있을지언정 고등교육의 목표일 수는 없다. 독서력은 초등학교 교과서가 아니라 대학교재를 읽을 수 있는 진전된 문해력이다. 세계 최저수준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학생들의 문해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는 독서량이고 독서력이다. 한 달에 한권 정도를 읽는 평균 독서량을 갖고서 우리 사회가 ‘독서력을 갖춘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흔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다. 그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서력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이나 일삼는, 그러면서도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수준 낮은 정부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미흡한 독서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독서는 정치적 차원에서도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될 만하다. 국민 다수가 정치와 역사와 철학에 대한 기본교양을 갖추고 말들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거짓말이고 꼼수인지 판별해낼 수 있다면 그런 국민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해도 최소한 좀 더 성의 있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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