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6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에린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들녘, 2012)가 서평감이다. 전작인 <계급론>(한울, 2005)과 마찬가지로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긴 하지만, 문제의식과 제안은 '진지하게' 공유할 만하다. 

 

 

 

주간경향(12. 03. 13)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를 떠올리게 한다. ‘유토피아’란 말 때문인데 ‘유토피스틱스’는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학문 활동을 가리키는 월러스틴의 신조어였다. 지난 세기말에 나온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더 이상 정상적인 작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으며, 이에 따라 다른 사회체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가라앉아 있던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다시금 가동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했다. 

 
아니 굳이 월러스틴의 제안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소련의 몰락 이후 전향하지 않은 좌파에게는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줄곧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진행해온 라이트는 이미 1990년대초부터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지휘하며 사회변혁의 이론을 모색해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자본주의 또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라이트가 지향하는 사회, 그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대안사회’다. 기본 발상은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이란 말을 진지하게 취급해보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진지하게’란 말은 ‘실제 현실에 맞게’란 뜻을 함축한다.


라이트가 구상하는 해방이론으로서 급진 민주평등주의는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라는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을 지향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사회적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사회정의의 조건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유의미하게 참여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정치정의의 조건이다. 핵심은 ‘평등한 접근권’에 있다. 그것은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똑같은 승리의 확률을 갖는 공정한 추첨은 평등한 기회는 보장하겠지만 평등한 접근권이란 기준에는 미달한다. 우리의 대학입시제도 같은 걸 떠올려보면 되겠다. 똑같은 시험을 치른다는 점에선 공정하지만 입시성적만으로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고 학벌사회에서 평생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면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평생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물질적 생활수준을 누리고 같이 번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런 접근이 차단돼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정치정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정치 참여수단에 대해 평등한 법률적 접근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주의의 권력이 강화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확장적 이해가 급진 민주주의의 요체다. 이 두 가지, 곧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과 급진 민주적 정치권력관을 합친 말이 ‘민주평등주의’다. 자본주의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계급관계와 경제조정 메커니즘이 이 급진적 민주평등주의 사회 실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라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세 영역에서 사회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리얼 유토피아’의 밑그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밑그림이 책상머리에서만 그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라질 남동부의 도시 포르토 알레그레 시의 시민참여형 예산 입안제도는 직접 민주주의의 진일보한 사례이며, 위키피디아는 인터넷의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극대화한 예이다. 사회권력이 자본주의 경제권력을 통제하는 ‘사회적 자본주의’의 다양한 사례도 ‘현실 유토피아’의 유효한 수단이다. 거기에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의지이고 결단이다.

 

12. 03.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