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제오늘 주문한 책들이 와 있는데(사실 휴일을 빼곤 거의 매일 책들이 온다. 거의 매일 주문한다는 뜻이다!) 그중 하나는 기획회의(313호)다. '철학자 강신주' 특집에서 총론을 맡아 쓴 바 있다. 그걸 옮겨놓는다. 페이퍼 제목의 '적정인문학'이란 말은 '적정기술'에 빗대 만든 신조어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기획회의(12. 02. 05) 인문학은 '사랑'이다

 

‘강신주와 인문저자’가 이번 특집에서 내게 맡겨진 꼭지다. 인문서의 동향에 조금만 밝은 독자라면 지난해 국내 인문저자로서 강신주의 두드러진 활약을 놓치지 않을 수 없다. 관계자에게서 들으니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인문분야 신간으로서 최대 베스트셀러였다(물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뿐인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의 후속작으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도 출간했고, ‘제작백가의 귀환’ 시리즈의 첫 두 권 <철학의 시대>와 <관중과 공자>도 숨 가쁘게 펴냈다. 아니 숨이 가쁜 건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의 몫이고, 그의 걸음은 더 빨라질 기세다. 유행하는 말로 ‘폭풍집필’ 모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강신주와 인문저자’란 제목은 바로 그런 상황을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듯싶다. 강신주가 앞서가고 다른 인문저자들이 뒤따라가는 현재의 상황 말이다(강신주 VS 인문저자들). 바야흐로 강신주가 대세다. 그는 편집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인문저자이면서 ‘우리시대 대표 인문학자’이다. 그의 비결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인문저자와 인문독자, 인문편집자를 두루 묶어서 일단은 ‘우리’라고 해보자.   

 

 

 

그의 순정한 인문학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니 강신주와의 첫 만남은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부터였다. 2004년에 나온 책이지만 나는 몇 년 뒤에 읽었다. 일단 노자를 ‘제국의 형이상학자’로 읽는 그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과문한 탓에 나도 노자하면, 장자와 묶어서 ‘무위자연의 철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장자>를 읽고서 크게 감흥을 얻었던 터라 장자를 전공한 저자에게서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다. 통념과 다르게 그는 단호하게 ‘노자와 장자’ 아니라 ‘노자 VS 장자’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장자의 철학>도 구하고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장자 & 노자>도 연이어 읽었다. 그의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태학사의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것인데, 강신주는 그 시리즈의 공동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아직 학계 안에 있었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장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동양철학자’라는 게 나의 머릿속 그의 분류 항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양철학 전공자라고만 한정하기에는 좀 특이했다. 서양철학, 특히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참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도가철학회에서 엮은 <노자에서 데리다까지> 같은 책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놓고 장자와 들뢰즈를 왕복하는 동양철학자는 적어도 내 기억엔 없었다. 그래서 특이하다 싶었고, 동양철학이란 말이 은연중에 풍기는 ‘엄숙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다. 그는 활달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인상을 더 강하게 각인시켜준 책이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었다. 그는 장자와 함께 모든 차이를 횡단하고자 했고 그것은 ‘즐거운 모험’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범속한 범주들의 칸막이는 더 이상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대학 아카데미즘의 속박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동양철학자’가 아니라 그냥 ‘철학자’이고자 했다. 그냥 ‘인문학자’이고자 했다. 그리고 대학 강의실 바깥의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다. 왜인가? 인문학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다

 

강신주는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즐거운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려는 정신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문학의 위기란 결국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인문학의 위기를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위기’로 인식하는 태도는 그것을 인문학자들의 위기로 간주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그에겐 인문학자들의 생계보다도 ‘인간의 사랑과 연대’를 회복하는 일이 더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간주된다. 물론 그런 대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인문학자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강신주는 실제로 그걸 믿는다. 그리고 실천한다. “나는 장자의 정신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란 바람은 거기에서 나온다. ‘순정한 인문학’이란 게 있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문학의 정신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다는 말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이란 말이 추상적인 만큼 그런 주장 자체도 추상적인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여러분, 사랑해요!”란 말은 연예인들의 상투어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말도 상투어의 혐의에서 아주 벗어나는 건 아니다. 순정한 인문학자라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강신주가 발견한 것은 인간의 ‘상처받기 쉬움’이다. 대학 바깥의 대중강연 활동을 통해서 인문학자의 자리와 역할을 새롭게 찾아간 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이끄는지 성찰한다.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지킴이를 자임하고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 인문학 카운슬러로 나선 것은 그런 이들에 대한 고려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감성적 소통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다. 우리가 상대를 눈앞에 두고 대화를 나눌 때, 우선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이 상대방의 표정이고 마음상태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가급적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야 함은 물론이다. 그게 대화니까. 강신주에게 철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 건넴’이며 대화의 기술이다. 


<철학의 필요한 시간>에서 그는 처음 어떻게 말을 건넸던가.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유리병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 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경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많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외로움을 견뎌왔다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그는 그렇게 전달받은 행운을 ‘유리병’에 담아 이젠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가끔 저의 책들이 서점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보곤 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저의 유리병편지를 꺼내 읽어볼까요?” 이런 것이 말하자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이 갖는 감성코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강신주를 ‘소통의 인문학자’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니, 이건 뒷북이다.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의 순정한 인문학적 태도나 감성코드는 어떤 전환이나 각성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 아예, 장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자>에서 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대목을 보자. “도(道)는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 강신주는 등산 애호가답게 등산로를 예로 든다. 깊은 산중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이 애초에 길이었을 리 만무하다. 그 길은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렇듯 장자에게서 ‘도’는 ‘관계의 흔적’이자 ‘소통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 이전에, 소통 이전에 도라는 건 없다. 강신주가 관계를 만들면서 소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가 장자를 통해서 얻은 깨달음의 실천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인문학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한 사례가 강신주 인문학이다.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장자에 관한 책들에 이어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부터 ‘제자백가의 귀환’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빠르고 너른 행보에 대해서는 이번 특집에서 따로 다뤄질 것이기에 나로선 특별히 <철학, 삶을 만나다>에 주목하고 싶다. 2006년에 나왔으니 그의 초기작이면서 강신주란 이름을 조금씩 유포시킨 책이다. 나는 입소문만 듣고 있다가 몇 년 뒤에나 구입을 하고 이후에도 그냥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철학과 삶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책들, 빳빳한 철학을 좀 부드럽게 다림질해준다는 책들이 한때 유행하기도 해서 ‘그렇고 그런 책’ 가운데 하나로 치부했었다.


한데 다시 펴본 이 책에 강신주의 ‘오래된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놀랐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의 소통과정에서 겪은 당혹스런 경험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제 이야기가 농담이 되느냐 진담이 되느냐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물론 장자의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다(道行之而成)”를 다시 반복해서 진술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란 화두이고, ‘타자와의 만남’이란 심급이다. 그런 관점을 조금 연장해서 말하자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아무리 정의를 내려 봐야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적어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인문학이라면, 대중과의 만남 이전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한번 찍힌 발자국일 따름이지 아직 길이 될 수 없다. 사건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이런 논리를 가장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아니 체득하고 있는 인문저자가 강신주이다. 이미 <철학, 삶을 만나다>에서부터 그는 두 가지 만남을 꿈꾸고 기획했다. 하나는 철학과 삶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들(‘여러분’)과의 만남이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그의 철학 또한 만남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 ‘동서양 철학이 모든 것’이란 부제 아래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을 불러다 맞세운 <철학 VS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까지 그의 책 대부분이 만남의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만남들은 물론 주선자의 속 깊은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각각을 따로따로 대면했을 때 보지 못한 부분들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더 편안하게 합석하여 이들이 대화와 논쟁, 혹은 밀어에 귀 기울이게 해준다. 그래도 만남의 자리가 어색하다 싶으면, 주선자가 아예 노골적으로 나서기도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같은 물음을 친근하면서도 자연스레 던질 수 있는 인문저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로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와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의 저자 김용규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동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인문학 대중화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저자들이다.

 

 


‘적정기술’이란 말이 있다. 원래는 에른스트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1965)라는 책에서 ‘중간기술’이란 개념으로 처음 소개했다고 하는데, 첨단기술과 토속기술 사이를 가리킨다. 슈마허는 서구에서 필요한 기술과 달리 빈곤국의 자원에 필요에 적합하게 소규모이면서도 간단하고 돈이 적게 드는 기술을 중간기술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기술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이 중간기술, 혹은 대안기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더 널리 쓰이게 된 게 적정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이 아닌 인간의 진보에 가치를 두는 과학기술을 총칭한다.”(김정태‧홍성욱,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이 중간기술이나 적정기술이란 개념을 인문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 그간에 ‘인문학 대중화’나 ‘대중인문학’이란 말이 ‘본격인문학’이나 ‘고급인문학’에 견주어 부당하게 폄하되거나 오해된 경우가 많았다. ‘대중 VS 엘리트’라는 대립적 구도의 산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 우리의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인문학을 ‘중간인문학’ 혹은 ‘적정인문학’이라고 부르게 되면 좀더 상생적인 구도를 만들어볼 수 있을 듯싶다. 우리에겐 ‘첨단인문학’뿐만 아니라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강신주 인문학은 그 적정인문학의 유력한 사례다.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문학으로서 적정인문학이 더 다양해지고 더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12.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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