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의 소식지 <사람과 책>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문장도 하나 교정해서). '내 삶을 바꾸는 고전읽기'가 기획특집인데 그 중 고전읽기 붐에 대해 짚어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생각해보다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를 실마리로 삼았다. 최근 황광우와 공저로 낸 <고전혁명>(생각정원, 2012)과 황광우의 <철학하라>(생각정원, 2012)도 '고전읽기 붐'과 연관된 책으로 볼 수 있겠다.

 

 

 

사람과 책(12년 2월호) 고전읽기 붐, 그 현상과 본질

 

얼마 전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을 청탁받고 쓴 적이 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이러저런 조언을 담은 책이었는데, ‘고전읽기의 즐거움’은 인문학을 소개하는 파트의 한 꼭지였다. ‘고전을 읽어보시오’ 같은 고리타분한 충고는 늘어놓기 멋쩍어서 ‘고전읽기의 즐거움’이란 말부터 의심하라며 서두를 열었다. 그게 의당 즐거운 것이라면 ‘고전읽기는 즐겁다’고 따로 설득할 필요도 없을 거라는 게 이유였다.

 

 

 

사실이 그렇다. 고전읽기를 즐기는 성향을 타고난 자도 없진 않겠지만 다수일 리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즐기기보다는 개그콘서트에 포복절도하는 게 더 흔한 일이다. 분명 고전은 고상한 책이긴 하지만, 동시에 고리타분한 책이다. 그게 통념이다. 읽었다고 과시하기엔 좋지만, 또 남들 다 읽었다고 할 때 혼자 안 읽었으면 좀 창피한 느낌이 들게도 하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머리에 쥐가 나는 책! 한데, 그런 고전읽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고전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하는 것과 실제로 읽는 건 별개의 문제다. 건강을 위해선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건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듯 인식과 실천 사이에는 유구한 간극이 있다. 그 사이는 저절로 메워지지 않는다. 어떤 강제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옆에서 꼬드기지 않는다면 책을 손에 들기 어렵다. 누군가 등 떠밀지 않고서는 러닝머신에 올라서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짚이는 책이 있다.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 2010)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가 대세였던 지난해, 그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굳이 부추김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책을 찾아 읽는 편이라 읽어볼 필요를 못 느끼다가 고전읽기 붐의 ‘원인’이 궁금해서 펼쳐보았다. 사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이 부제라고 하면 나름 솔깃하지 않은가. 저자가 말하는 고전은 인문고전인데,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의 태반이 문학, 철학, 역사 분야의 고전이므로 ‘고전=인문고전’이란 등식도 억지는 아니다.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고전(古典)’과 ‘비고전(非古典)’, 즉 ‘고전’과 ‘고전이 아닌 책’이다. 그리고 무엇이 고전인가에 대한 정의도 간명하다. “천재들의 저작”이다. 말 뜻대로 하자면 고전이란 오래된 책,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을 가리키는데, 천재들의 저작이 아니고서야 “짧게는 100-200년 이상, 길게는 1,000-2,000년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고전이 천재들의 저작이므로 고전을 읽는 일은 천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천재들의 ‘개인지도’를 받는 일이다. ‘천재’라는 말이 막연하다면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도 좋겠다. 저자의 제안은 이런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매일 두 시간 이상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불문가지다. 독자인 우리도 그들 수준에 근접하게 된다. 하물며 노벨상 수상자라고 해봐야 불멸의 인문고전을 남긴 진정한 천재들에 비하면 ‘머리가 조금 좋은 사람들’에 불과하다면, 이 천재들의 개인지도에 비견할 만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좋다, 천재들의 책이라는 고전을 읽고 우리도 천재를 닮도록 하자. 천재적인 사고를 해보도록 하자. 그 자체로 신나는 일일 것도 같다. 한데,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가 보기에 고전읽기는 단순히 ‘즐거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의 체험적 고백에 따르면,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책이 인문고전이다. “재미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난 서양철학 고전들 같은 경우는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판독 불가능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의 두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켜주는 책은 인문고전밖에 없고, 그렇게 뇌가 변화할 때만 우리는 생존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절박한 이유다. 아예 생존을 위해서 억지로 인문고전을 읽는다는 고백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쯤 되면 ‘고전읽기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그렇다고 치기어린 절박함은 아니다. 다소 거칠더라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먼저, 정치적인 근거.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이 두 계급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이 인문독서의 유무라고 말한다. 가령 조선의 지배계급인 선비들에겐 인문고전 독서, 곧 글공부가 주업이었다. 하지만 그 인문고전 독서가 피지배계급에겐 금지됐다. 책은 아무나 읽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책을 읽지 않는 마당쇠가 책을 읽는 선비를 지배한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던가.”


행여 똑같이 책을 읽는다고 해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읽는 책의 종류가 달라야 했다. 근대국가로 발전해나가는 데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가 필요하기에 학교교육을 도입한 프로이센(독일)에선 군대에서의 명령과 공장에서의 작업지시를 수행할 수 있는 만큼의 지식을 가르쳤다. 국민이 너무 똑똑해지는 건 불필요했고 또 바라지도 않았기에 인문고전 교육은 빼놓았다. 단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만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일식 교육 교육제도를 그대로 수입하여 우리에게 이식한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었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교육은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계급을 위한 교육, 직업군인과 공장노동자를 생산하기 위한 교육이다. 저자는 우리의 학교교육과정에서 인문고전 읽기가 배제된 것이 그러한 식민지 교육의 부정적 유산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그래서 촉구한다. 깨달아야 하다고. “이제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 두뇌와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인문고전을 안 읽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경제적인 근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전 세계 부의 90퍼센트 이상은 세계 인구의 약 0.1퍼센트가 소유했다.” 예전에 그 0.1퍼센트는 왕과 귀족이었지만 지금은 월스트리트의 투자자와 세계적인 기업가 들이다. 이 부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 시대를 풍미한 투자가들의 삶을 조사해본 결과 저자가 얻은 결론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이들이 독서광이면서 최고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가라는 점이다. 가령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갖기 위해선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가까이에서 사례를 찾자면 이병철의 ‘인재경영’과 정주영의 ‘의지경영’도 그 출처는 인문고전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빈민을 위한 인문학과정을 설립한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핵심을 이렇게 끄집어낸다. “여러분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고전읽기의 즐거움’ 차원을 넘어서는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전읽기의 절박함’이다. 이런 절박함이 혹 고전읽기 붐에도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지. 저자는 젊은이들이 “지금부터라도 인문고전 읽기에 목숨을 걸기를 원한다.” 너무 과장된 소망인가. 하지만 동의하는 바도 없지 않다. 먼저 인문고전 독서는 우리의 두뇌를 변화시킨다는 점. 우리가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는 건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 책이나 읽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을 읽는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고전이란 애당초 전범이 될 만한 좋은 책을 뜻하기에 고전읽기가 우리의 두뇌활동을 자극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혜를 열어준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문고전 읽기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승자가 되는 법’이라고까지 저자는 강조하지만, 그보다 동감하는 건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진정한 목표는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보다 나은 교육목표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행복한 천재’도 되고, 개인과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혹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각자가 자주적이고 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이 된 다음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즐거움만도, 절박함만도 아니다. 우리에겐 ‘고전읽기의 절박한 즐거움’이 필요하다. 고전읽기 붐이 그런 즐거움과 함께하면 좋겠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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