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저 형태로 올해 처음 낸 책은 <대한민국 청소년에게2>(바이북스, 2012)이다. 16명의 저자가 참여해 '개념 청소년'들에 대한 조언을 담았다. 내가 제안받은 건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란 글이었고,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책을 읽을 자유>의 일부 내용을 보완해서 청소년용으로 만든 글이다. 서두만 옮겨놓는다.

 

 

 

모든 일에는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동의한다면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다. 최소한 그게 그토록 즐거운 것이라면, 그래서 ‘순수한 즐거움’이라면 널리 광고할 일도 없으며 이런 자리에서 내가 길게 떠들어댈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제군들은 일단 그걸 의심해야 한다. 이미 경험적으로 체득한 바도 있겠지만 어른들의 말은 다 의심해야 한다. 속칭 ‘꼰대’들의 말이라는 것. 물론 이 ‘의심하라!’는 주문조차도 어른들의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건질 수 있는 ‘꼰대적’ 격언이다. 모든 의심을 가능하게 하는 의심의 토대가 ‘의심하라’라는 명령이니까. 그거 하나는 믿어도 된다.


그럼 의심이 왜 중요한가. 그렇게 의심할 때 제군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세상에 믿을 건더기가 없어!”라고 푸념할 때, 제군은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이렇게 의심하고 푸념하는 ‘나’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게 사실은 가장 놀라운 일이고 경이로운 일이며 기적적인 일이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걸 기억하는가? 그때 ‘생각한다’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된 게 실상은 그의 의심이고 회의였다. 우리는 뭔가에 대해서 의심할 때 비로소 ‘주체’로서 존재한다. 말이 어려운가? ‘나답게’ 존재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신세 지지 않고, ‘나답게’ 당당하게 존재하는 건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 내게 들리는 모든 말들을 의심할 때이다. 그런 걸 ‘괄호 안에 넣기’라고도 말한다.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보류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미덥잖다는 표정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보류해놓는 주체, 그게 ‘나’이다. 왜? 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너’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란 건 ‘팩트’로 어느 정도 지정할 수 있다. ‘읽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읽기’와 ‘읽는 척하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같은 까다로운 질문도 가능하지만, 여기선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문제는 ‘즐거움’이다. 즐거움 혹은 쾌락이란 건 상당히 주관적이니까. 누군가의 즐거움이 모든 사람의 즐거움이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고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즐거움이 다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꼴을 보면 또 비슷비슷한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서로 비슷비슷하면서도 제각각인 것인가? 얼추 그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즐거움 또한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우리가 저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제각각의 즐거움을 누리지만, 또 어떤 즐거움은 끼리끼리 공유하기도 한다. 맘이 맞고 죽이 맞는 관계는 그래서 만들어진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해볼 수 있다면 이런 근거에서다.(...)

 

12.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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