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북리뷰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서평이라기보다는 독서의 제안 같은 것으로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저렇게 미뤄지다 보니 뒷북성 리뷰가 됐다. 아니 그럼에도 너무 이른 서평이 됐다! 모스의 <증여론>(한길사, 2002)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와 같이 다루려다 보니 견적이 너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여러 사정상 맛보기에 해당하는 내용만 적었다...

 

 

 

프레시안(12. 02. 10) 자본주의 무너뜨릴 궁극의 무기? '선물'!

 

몇 번 마감을 연기한 서평을 쓴다. 마치 공부가 미진한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든 기분이다. 문제는 '좋아하는 과목'이라는 점. 벌써 두 달쯤 전에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오창현 옮김, 문학동네 펴냄) 서평을 제안 받고 나는 기꺼이 응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마침 읽어보려던 책이었기 때문에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데 처음 몇십 쪽을 읽다가 만만찮은 책이란 걸 감지하고 부랴부랴 영역본까지 주문했다. 저자가 '증여의 수수께끼'와 정면승부를 벌이려는 각오였기에 옆에서 '구경하는' 처지에서도 나름 각오는 필요해보였다.

 

돌이켜보니 그런 긴장감을 느끼게 한 책으론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펴냄)도 있었다. 사르트르의 상상력 론과 정면 대결을 펼치려는 것으로 보인 서두에서부터 대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걸 감지했다. 이 역시 영역본을 구해놓고 정좌하며 읽을 채비를 했지만 정작 독서는 다른 일들에 파묻혀 아직도 미결 과제로 남아 있다. 700쪽이 넘는 분량도 좋은 핑계거리가 돼주었고. 하지만 <증여의 수수께끼>는 비록 350쪽에 이를지라도 그 절반도 안 되는 분량이다. '선택 과목'이라고 골라놓고 미적대다가 '낙제'를 받는다면 어찌 체면을 구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요령껏 답안지를 작성하는 수밖에.

 

일단 '증여'란 말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증여론>(한길사 펴냄)의 저자 마르셀 모스와의 관계부터 언급해야겠다. 뒤랑이 사르트르와 대결한다면 고들리에의 상대는 마르셀 모스다. 저자 소개에서부터 고들리에는 "마르셀 모스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잇는 프랑스 인류학계의 거장"이라고 돼 있다. 모스를 태두로 하는 프랑스 인류학의 적통이란 얘기다. 실제로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책에서 절반 이상의 분량이 1부 '모스의 유산'에 할애된 것만 보아도 모스가 가진 비중을 알 수 있다. 고들리에가 서문에서 적은 고백대로라면 모스의 <증여론>은 그의 인생 진로를 바꿔놓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1957년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모스 연구 입문>과 함께 모스의 <증여론>을 처음 읽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전히 철학도였으며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 1957년에 쓴 나의 노트에는 이 두 글을 읽고서 열정에 사로잡혔던 기록이 담겨 있다." (18~19쪽)

 

결국 고들리에는 <증여론>을 읽은 뒤에 인류학자가 되었고, 멜라네시아로 현지조사를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이 패기만만한 인류학자는 자신의 스승들을 재평가하게 될 단서들을 얻는다. "나는 그곳에서 증여의 비서구적 형태를 보았고, 이로부터 증여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21쪽) 
 
즉, 고들리에는 모스와 레비스트로의 주장 가운데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가를 판별하고자 한다. <증여의 수수께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인데, 그런 사정을 고려하면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염두에 둔 독자는 일반 독자가 아니다. 죽은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동료 인류학자들이 그의 대화와 논쟁 상대자이다. 증여란 주제로 놓고 자신이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유산을 어떻게 갱신하고 또 넘어서고 있는지를 입증하고자 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인류학자 고들리에의 출사표이자 자기 존재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증여론>을 둘러싼 이론적 모험을 한갓 인류학 동네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학자들의 논쟁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서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고들리에의 책보다 더 유익한 참조가 되는 것은 영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펴냄)이다. <증여의 수수께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스의 <증여론>과 함께 꼭 같이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우리에겐 먼저 소개됐지만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2001년)은 <증여의 수수께끼>(1996년)보다 나중에 나온 책이다. 당연히 그레이버는 고들리에를 참고하면서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번역본의 찾아보기에는 고들리에가 한번 언급되는 걸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자주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증여론>과 사회주의 이론과의 관계를 다룬 부분이다. 이 점은 그레이버가 특별히 강조하는 바인데, "오늘날 모스가 한평생 대단히 헌신적인 사회주의자였음을 의식하는 인류학자들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338쪽)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특히나 영미에서 그렇다고 하는데, 고들리에는 <증여의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스는 양도 불가능한 재화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눈에 혼란스러워 보였던 논쟁, 집단적 소유권과 개인적 소유권을 둘러싸고 19세기 말부터 펼쳐졌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다시 불붙여 놓은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스가 평생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로 살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77쪽)

 

하지만 모스가 <증여론>을 쓰고 있던 1923년과 1924년 전후는 그가 가장 활발하게 정치적 활동을 펼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운동의 지지자로서 밑으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했기에 폭력을 통한 사회주의 성취 기획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그는 소비에트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려운 전시 상황을 인정하는 한편, 그들이 휘두른 폭력이나 민주적 제도, 또 무엇보다 법치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강하게 비판했다."(339쪽)

 

즉,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지지했지만 볼셰비키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모스의 입장이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모스에 대한 고들리에의 평가가 좀 부정확하다고 본다. 그가 각주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모스와 고들리에를 이해할 때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돼 옮겨 보면 이렇다.

 

"모리스 고들리에는 모스를 '철저한 반 볼셰비키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고들리에가 1997년에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을 참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려진 평가라고 생각된다. 1997년 재출간된 모스의 정치적 저술들에서 우리는 그가 러시아 혁명에 대해 대단히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사실상 그의 정치적 비전이 많은 점에서 그의 멘토였던 조레스보다 프루동 같은 아나키스트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39쪽)

 

물론 우리에게 소개된 모스의 저작은 <증여론>밖에 없기 때문에, 모스의 작업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음미하기엔 한계가 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로 분류되는 고들리에조차도 모스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오해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이니까 '모스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알 수 있다(고들리에는 모스를 사회주의자 내지 사회민주주의자로 보는 반면에 아나키스트 인류학자를 자임하는 그레이버는 모스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더 많이 본다).

 

그래도 무엇이 '모스의 유산'(고들리에의 표현)인지, 왜 '다시 모스에게로'(그레이버의 표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줄거리만 챙겨놓자면, 모스는 화폐를 매개로 한 자본주의 교환 경제와는 다른 체계의 원리를 찾아내고자 했다. 고들리에를 재인용하자면 모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랬다.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우리 서구 사회이다. (…)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이와는 다른 무엇이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계산기 같은 복잡한 기계가 아니었다." (102쪽)

 

'경제적 동물'로서의 인간, 곧 호모이코노미쿠스란 '계산기 같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부를 분배하는 다른 원리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증여'를 매개로 한 '총체적 호혜 관계'다. 이 호혜적 관계에서 의무는 무제한적인 성격을 갖는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그에 대해 값을 치르면 거래가 종료되는, 그래서 얼굴을 두 번 볼 필요가 없는 관계와는 다르다.

 

그레이버가 드는 사례를 참고하면, 가령 새 카누가 필요한 멜라네시아의 남성은 여동생의 남편과 그의 가족들에게 부탁한다. 상대에게 아내를 제공한 것이니까 상대편은 사실상 그에게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므로 특정한 상환 의무에 따라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해야 할 무제한적 의무를 갖는다. 모스에 따르면 이것이 '공산주의'다. "누군가 바로 그것에 대해 답례를 하거나 값을 치르지 않고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식의 공산주의와는 다른 '개인주의적 공산주의'다. 그 다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모스의 <증여론>과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 그리고 그레이버의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서로 만난다.

 

우리가 새로운 가치 이론과 새로운 사회 구성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증여라는 문제는 인류학자들만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다소 학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를 읽을 정도의 관심과 성의가 있다면 모스와 그의 후계자들의 작업에도 주의를 돌려보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로 돌아간다. 이제 비로소 본론에 들어가야 할 테지만, 시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그래도 성의는 보였으니 '낙제'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네? '재시'라고요?

 

12. 02. 11.

 

 

 

P.S. 마르셀 모스의 책도 그렇고, 그에 관한 책도 그렇고 아주 드물게 소개돼 있는데(물론 모리스 고들리에의 책도 <증여의 수수께끼>만 나와 있다), 브뤼노 카르센티의 <마르셀 모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동문선, 2009)가 프랑스에서 나온 입문서격의 책이다. 간단한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도 모스의 <증여론>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기부론>이라고 옮겼다).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도 증여의 문제를 독창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사랑과 경제를 하나로 융합하는 새로운 증여의 철학"을 제시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번주에 나온 <2012 베스텐트 한국판>(사월의책, 2012)이다. <베스텐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공식저널이라고 하는데, 올해부터 매년 한국어판이 나오는 듯하다(책을 받아보니 연 2회 출간이다). 한국판 특집도 따로 있지만 이번판 쟁점주제가 선물(증여)론이다. 간단한 소개를 옮기자면,

"이번 <베스텐트 2012>는 마르셀 모스,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주목했던 ‘선물’이라는 주제를 쟁점으로 잡았다. 부자들의 기부 열풍, 자원봉사와 재능 기부 등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타적 행동, 인터넷에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수많은 네티즌들. 왜 이처럼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지 않고서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에게 ‘선물’하는 것일까? 선물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결속하며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마르셀 에나프의 독창적 주장과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악셀 호네트의 비판적 고찰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진다."

그 논쟁이 궁금해서 책은 바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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