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402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올해까지 연재하게 될 듯싶다. 이달의 주제는 '조선의 왕'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인기를 고려해서 고른 주제다.

 

 

 

책&(12년 1월호) 조선의 왕과 왕실

 

세종의 한글창제 과정을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안방극장에 열풍을 몰고 오면서 세종의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평가되니 남다른 주목을 받을 만하다. 그런 관심을 아예 ‘조선의 왕’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물론 TV사극에서 단골로 다루는 인물이 조선의 국왕들이기에 그들의 일상사와 말투까지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의외로 역사학자들의 관심에서는 좀 벗어나 있었다. 왜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왕실문화총서’로 출간된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돌베개, 2011)를 통해서 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근대화에 실패한 왕조의 군주라는 인식이 조선의 왕과 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덧붙여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에 장애가 되어왔다. 최근 들어 조선 왕실과 왕실문화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러한 부정적 인식과 해석상의 장애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왕실 도서관 소장 자료의 영인과 해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연구 환경이 좋아진 것도 앞으로 넓은 시야에서의 깊이 있는 연구를 가능케 할 전망이다.


조선 왕은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로서 <조선 왕으로 살아가기>는 국왕의 하루일과에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문학적 세계와 건강관리법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서 길잡이로 요긴하다. 조선의 국왕,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재위했던 국왕 27명의 평균수명은 47세였으며, 평균 재위기간은 약 19년이었다. 평균 재위기간이 고려 때보다 5년 정도 길며 이것은 그만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이는 52년간 재위했던 영조이며, 숙종, 고종, 선조, 중종, 순조, 세종 등도 30년 이상 권좌에 있었던 왕들이다. 보통 재위기간이 길수록 왕권이 탄탄했다.

 

권력이 모두 집중된 만큼 왕의 업무는 과중했는데, 일과는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단계로 구분됐다. 웃어른에 대한 문안인사와 경연, 그리고 아침식사 후의 조회가 오전의 일과라면 점심식사 후에는 다시 경연으로 시작하여 지방행정에 관한 보고를 받거나 민원을 해결하는 등의 업무를 보게 되며 대략 5시경에 종결된다. 하지만 공식 업무 후에도 다시 경연이 이어지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낮 시간에 미뤄둔 업무를 마저 보기도 했다. 이를테면 국왕의 야근이다. 촘촘하기로는 연간 일정도 마찬가지여서 왕은 정월 초하루부터 24절기에 맞춰 많은 일과 행사를 주관해야 했다. 물론 유교적 예치(禮治)를 표방한 국가였기에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제사였고, 왕의 1년은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끝났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은 <조선 국왕의 일생>(글항아리, 2009)은 말 그대로 조선 국왕의 일생에 대한 주제별 스케치이다. 초점 가운데 하나는 절대권력자인 왕의 권한을 어떻게 통제했느냐이다. ‘종신직’으로서 국왕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였기에 훌륭한 왕이 되게끔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왕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마련한 것이 ‘기록’과 ‘교육’이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국가 기록을 통해 국왕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했고, 정상적인 국왕이라면 이를 의식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왕은 왕세자로 책봉되고 국왕에 오르기까지 각종 교육과정을 거쳤고 왕위에 오른 뒤에는 경연에 참석해야 했다. 연산군처럼 경연을 폐지한 경우가 아니라면 경연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경연이란 왕이 유가의 경전과 중국‧우리나라의 역대 역사를 공부하는 자리로서, ‘경연에 관한 모든 것’은 김태완의 <경연, 왕의 공부>(역사비평사,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왕에게 건강은 공부만큼 중요했다. 유학에서 사후에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법치보다 사전에 다스리는 덕치를 더 우선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질병에 대한 사후 처치로서의 약치(藥治)보다 더 나은 것은 미리 예방하는 식치(食治)였다. 평소에 먹는 음식을 통해서 건강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조선의 왕실은 다양한 종류와 죽과 차를 대표적인 식치 음식으로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조선의 왕들이 모두 무병장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함규진의 <왕의 밥상>(21세기북스, 2010)은 ‘밥상으로 읽는 조선왕조사’를 가지런하게 보여주는데, 흥미롭게도 세종은 왕실의 식치가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였다. 운동은 게을리 하면서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공부벌레였던 까닭에 재위 초년의 세종은 보기 거북할 정도로 뚱뚱했으며 서른 즈음부터는 당뇨와 합병증에 시달렸다. 고기반찬만 좋아하고 절식과 폭식을 반복했던 식습관도 ‘성군’의 이미지와는 얼핏 맞지 않는다. 하지만 세종은 궁궐 법주(法酒)에 들어갈 노루 뼈를 위해 사냥에 나섰던 사람이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는 술에 노루 뼈를 넣지 말라고 지시한 성군다운 일화도 남기고 있다.

12. 01. 14.

 

 

 

P.S. 왕정국가였던 만큼 조선은 왕이 통치하는 국가였지만 선비들의 강한 견제를 받았기에 실제로는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진 않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 관점에서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곧 선비들에도 관심을 가게 되는데, 어제부터 읽고 있는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 2011)가 개관으로 유용하다. 가령 직언을 마다하지 않는 신하를 뜻하는 <직신>(리드잇, 2012)이 조선 선비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준다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조선 사회의 '독점적 지배층이자 유일한 지식인 계층'으로서 선비의 전체상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저자의 결론은 사뭇 부정적이다. 김연수의 <조선 지식인의 위선>(앨피, 2011)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보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