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책들'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곧 후회했다. 아니 난감했다. 가끔씩 실종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부지기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책도 절판이군', '이 책도 사라졌네', '이것도 곧 절판되겠구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가끔씩 쓸 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청원'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온갖 변명거리를 찾아서(숙달된 일인지라 어렵진 않지만) 왜 당장은 페이퍼를 쓸 수 없는지 해명해야 한다. 대개는 두 종류다. '알잖아,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 '잊었어?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그러다 딱 걸렸다 싶은 책이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책세상, 2000)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페렉의 신작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문학동네, 2012)이 출간됐고(당일배송이 아니어서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어제 펼친 책 찰스 파스테르나크(생화학자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조카다)의 <호모 쿠아에렌스>(길, 2005)의 서문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개의 과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고, 전체 유기체가 그 많은 환경이나 마주치는 동종, 이종 생물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소설 <삶, 사용자의 매뉴얼(Life, A User's Manual)>(1988)에서 조르주 페렉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인 과학의 맹점을 꼬집는 일종의 은유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언급하고 있다. 퍼즐 한 조각을 아무리 살펴본들 전체 형태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는 못한다. 부분의 역할은 오로지 전체 형체를 알고 난 후에만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필시 <삶, 사용자의 매뉴얼>이라고 옮겨진 책(영역된 책)이 <인생사용법>일 터이다. 찾아보니 표지가 멋지다. 2009년에 나온 2판이다.
그래서 <인생사용법>을 영역본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급하게 들었다. 사실 <인생사용법>은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이어서(두께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는 체하기도 멋쩍다. 그 멋쩍음을 해소할 좋은 기회이지 싶지만, 문제는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 '사용'을 좀 해보려고 하니 '인생'이 보이지 않는 격이라고 할까. 알라딘에선 '품절'로 뜨는 이 책이 다시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애서가들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란 사실만은 적시해둔다(읽는 건 나중 문제다).



조르주 페렉이란 이름을 떠올린 계기는 며칠 전에도 있었다. 최윤의 새 장편소설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 2011) 때문이다. 제목만 봐서는 번역소설과 분간이 안 되는데, 문장도 그렇다.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파리 바케트'풍의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계산이 맞지 않아 골치를 썩였던 하루의 근무, 퇴근 시간 버스 안의 격투를 치르며 겨우 유지되는 육체의 균형, 이름없는 이 카페까지 걸어오는 동안의 굽 높은 구두의 시련...(12쪽)
작가가 불문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특별히 머릿속에서 호명되는 작가가 페렉이다. 그건 <사물들>(세계사, 1996)이 남긴 인상 때문인데,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됐으니 주관적으로 각색되었을 수도 있다. 다른 프랑스 작가들을 더 많이 읽었다면 단서도 늘어났겠지만, 페렉만 읽었으니 페렉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뭔가 친근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확인해보려면 새로 번역돼 나온 <사물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을 손에 드는 수밖에. 이 <사물들>의 영어판 표지는 이렇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과 짝이다.

페렉의 작품은 그밖에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열린책들, 2010)이 더 소개돼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실험적인' 것처럼 이 역시 그렇다.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이다.


사라진 책 한 권을 빌미로 조르주 페렉을 일람한 기분이 든다. 정리해보자. 당장 손에 든다면 <사물들>, 그리고 좀 티를 내고자 한다면 <인생사용법>이라는 것. 나는 잠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들어가볼 참이다...
12. 01. 07.


P.S. 사실 <인생사용법>을 떠올린 계기는 하나 더 있다. 엊그제 데리다의 마지막 인터뷰 <최종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구해서이다.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인터뷰' 시리즈의 하나인데, 커트 보네커트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인터뷰도 나와 있다. 언젠가 '마지막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인생사용법이 따로 있는가?..


P.S.2. <인생 사용법>(문학동네, 2012)이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됐다. <잠자는 남자>(문학동네, 2013)도 연이어 나왔다. 페렉의 서가도 자못 채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