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이 간 지난주 신간은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이다. 어제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이 아직 안 와서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소개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와 묶어서 다룬 기사다.

 

 

 

경향신문(11. 12. 17)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나누면 왜 행복해질까

 

‘기부’의 사전적 뜻을 보면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이다. 그런데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의 저자가 보기에 기부행위는 사전의 정의보다 복잡하다. “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 사이에 일어나는 기묘한 심리적 줄다리기, 가령 우월감과 열등감, 권리와 의무, 지배와 굴종, 승리와 패배 등의 요소들이 폭넓게 작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공직선거법은 선거구의 기관·단체나 시설에 기부하는 것을 제한한다. 표와 ‘교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명예나 평판, 자기만족이나 행복을 위한 기부는 바람직할까. 4명의 철학자는 기부의 순수성과 본질에 관해 탐구했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 조르주 바타유, 장 폴 사르트르가 전개한 기부 이론을 비교·분석한다. 모스는 <증여론>으로 주로 번역된 <기부론>에서 모든 기부는 경제적 교환의 일종이며 따라서 모든 기부는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스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 의식이다. 출생과 사망, 성년식 때 벌어진 포틀래치는 성대한 축하연과 함께 모피나 사냥배 등을 선물하는 관습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같은 가치나 상회하는 가치의 답례를 해야 했다. 모스는 주거나 받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의 이유를 정령숭배에서 찾았다. 인디언들은 ‘소중한 것’에 기부자의 ‘하우(hau, 일종의 영)’, 즉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에서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하고, 권력과 우월한 지위 등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써의 포틀래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순수한 기부행위’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기부행위의 전제는 더 까다롭다. 데리다는 “기부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기부행위를 인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기부행위로 인지하는 순간, 기부행위는 경제 개념과 연결되면서 교환행위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리다의 결론은 기부란 ‘순수 기부행위’와 ‘경제적 교환’이라는 두 개념의 모순적인 ‘병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기부’의 대안을 사르트르에게서 찾았다. 사르트르는 애초 ‘주는 행위’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를 ‘홀려’ ‘굴복시키는 행위’로 규정했다. 포틀래치는 ‘타인에 대한 속박’인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후 기부를 도덕정립의 핵심 개념으로 바꾸었다. 기부행위에 포함된 독성을 완화시키는 작업인데, 바로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익명 기부’는 경제적 교환으로써의 기부행위와 순수한 기부행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대안이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익명 기부’에만 의존할 일일까. 모스는 <기부론>에서 사회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재산 일부를 추렴, 일종의 공제조합을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시했다. 뉴기니 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쿨라’ 의식도 소개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3자에게 다시 선물을 주는 것이다. 섬 전체를 도는 선물의 대연쇄는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에 나오는 캐나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던의 실험은 ‘쿨라’와 비슷하다. 모르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안부를 물었을 때 집주인이 답하면 50유로가 들어있는 봉투를 주는 실험이었다. 집집마다 내건 조건이 달랐다. 한 집은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어떤 집은 다른 사람에게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튿날 조사하니, 남에게 돈을 쓴 사람의 기분이 더 좋았다고 한다. 책의 핵심 주장은 “단기적으로 볼 때 이기주의자가 훨씬 잘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서간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뇌과학 등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예컨대, 이타적 행동은 초콜릿을 먹거나 섹스 할 때 활성화되는 바로 뇌회로들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이타적 행위도 결국 교환행위나 이기심을 위한 행위 아닌가. 지하철 선로에 빠진 승객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행위를 결과나 이익을 고려한 경제적 행위로 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만명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지켜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장이나 골수를 기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독일의 모금액만 6억7000만유로였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네트워크다. 온라인 에서 낯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흔하다. 저자는 “사냥한 들소의 고기나 지식의 열매를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공동체는 큰 비용을 들여 울타리를 두르는 공동체보다 모든 관점에서 뛰어나다”며 “미래의 무중력 경제에선 나눔정신과 이타심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1.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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