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니만큼 한해를 정리하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올해 출판문화상 수상작 발표기사들을 읽다가 문학결산 좌담기사도 생각이 나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무경향의 경향'이 올 문학계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한국일보(11. 12. 12) 고립된 채 길 잃은 문학… 지속가능성 있나 고민해야"

 

올 한해 한국문학 베스트셀러의 두 톱은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와 공지영씨의 <도가니>였다.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시장 진출에 힘입어 올해만 40만부 가까이 판매돼 상반기를 주름잡았고 <도가니>는 지난 9월 영화 개봉으로 사회적 신드롬까지 낳으며 40만부 이상 나가 하반기를 석권했다. 하지만 두 작품은 각각 2008년과 2009년 출간된 책으로 엄밀히 말해 올해의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2, 3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장편소설 활성화로 올해도 많은 장편소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 작품들이 1쇄 판매도 넘지 못한 채 사장되고 1만부만 넘겨도 '대박' 소리를 듣는 처지다. 그나마 김애란씨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과 정유정씨의 <7년의 밤>이 2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선전하고, 황석영 김훈 최인호 최인석 등의 작가들이 잇따라 신작을 내며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중견 평론가 김영찬씨와 신진 평론가 강동호씨가 올 한해 문학계의 흐름을 두고 대담을 벌였다. 이들은 "2010년대 문학은 미학적 쇄신을 보이지 못하고 현실과의 긴장을 잃으면서 길을 잃은 모습"이라며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며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시대를 읽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경향이 경향, 미학적 쇄신 안 보여"
▦강동호= 올 한해 문학의 경향에서 별다른 키워드가 잡히지 않는다는 게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2000년대 문학이라면 1990년대 문학의 반작용으로서 탈내면, 무중력, 환상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던 데에 반해, 2010년대 들어서는 그런 반작용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유행이나 흐름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이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지금 작가들이 직면해 있는 문학사적 환경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김영찬= 정말 무경향이 경향이랄까, 집단적 흐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2000년대 문학은 '포스트 IMF 시대의 문학'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시장자본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발생한 한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이 그 배경이다. 현실을 변화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즉 현실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무의식 속에서 나오는 우울과 체념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2000년대 문학은 세계의 압력을 견디는 방법론으로서 나름의 미학적 쇄신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2000년대 문학이 제 사명을 다한 상황에서, 진전된 모습이나 의미있는 미학적 쇄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인을 생각하면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현실과의 긴장 자체를 어느 순간 놓아 버리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강= 문학사적 맥락에서 이전 세대와 긴장을 빚거나, 아니면 당대성을 띠면서 현실에 맞서는 과정에서 긴장이 나올 텐데 지금은 둘 다 회의적이다. 장르문학과 접속하는 경향 역시 한국문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본격문학의 엄숙함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로서 산뜻하고 신선한 면이 있지만, 생각보다 주제의식이 깊지는 않다. 재기 발랄하긴 하지만, 아직은 소재적인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우려도 된다.

▦김= 장르적 기법을 활용한 모범적 사례가 박민규 작가다. 장르적 기법을 활용할 경우 필연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작가들에게도 그런 게 있는지 의문이다. 기법적 실험이 중요하지만, 그게 왜 지금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좀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본다.

"장편소설 활성화했지만 세계 인식 빈약"
▦강= 문학이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지만 장편소설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2, 3년 전부터 인터넷서점이나 인터넷 카페, 웹진, 문예지 등이 장편을 연재하면서 장편소설 붐을 조성하고 있는데, 늘어난 양만큼 독자들이 즐거운 체험을 했는지 회의적이다. 사실 장편은 독자를 확 묶어주는 공통의 이야기 체험인데,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가 담당하고 있다. 지금 소설이란 장르가 근대문학이 했던 그런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김= 한국 문학이 단편 중심으로 굴러온 것은 단편을 주로 싣는 문예지 시스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문단 제도가 문학의 가능성을 옥죄어온 면이 있는데, 독자로부터 고립되고 문단 안에서만 통용되는 문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독자와 소통하기 적합한 장르가 장편이다. 특히 지금은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면서 대중의 현실감각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 '공감'과 '연대'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장편을 원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작가들이 이런 요구를 절실히 느껴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한다는 요구에 단순히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강= 개인적 경험에 비춰 보면, '포스트 IMF 시대'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은 시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장편은 단순히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구조를 완성해야 하는 장르다. 그래야 인물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은 이런 점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건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적 체험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만 해도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어떤 세계와 싸워야하는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당면하고 대결해야 할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없기에, 장편적 세계관을 구성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편소설 응모작 중 상당수가 루저나 백수들의 즉물적이고 자족적인 이야기들인 것도 그런 징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역할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김= 올해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독자들과 시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 <도가니> <두근두근 내 인생> 은 독자들이 처한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감정적 연대를 불러일으킨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통해 무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돌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을 건드린다. <도가니>도 교육계 사법계 등 부패한 현실 권력을 고발하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 아이를 통해서 미래가 막힌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위기감, 죄의식 등 시대적 정서와 함께 호흡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독자들이 위로를 얻은 것도 이 대목에서다.

 

 

중견 작가들의 선전도 봐야 하는데 최인석의 <연애, 하는 날>은 정통적 소설 문법을 가지고도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하나의 성과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이다. 범죄 서스펜스 장르물인데, 무엇보다 재미있고 디테일이 살아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장르소설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상황에서 대중 독자를 많이 확보, 이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뜻 깊다. 스티븐 킹 같은 수준 높은 장르작가의 작품을 '중간 소설'이라 부르는데, 중간 소설층이 두텁게 형성돼야 본격문학도 발전한다. 축구에서 미드필드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 본격문학 작가들이 <7년의 밤>을 철저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강= <7년의 밤>은 우리 문단의 분열증적인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는 타자다. 이를 중간 영역에 새로운 문학적 양식들이 포진할 수 있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 대다수 작품들은 5,000부 판매도 힘든 상황이다. 독자와의 괴리가 커지고 있는 반면 스타 시스템은 심화하고 있다. 고립을 자초하고 문단 제도에 안주했던 문학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물어 봐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이 가운데서도 '앵그리 영 제너레이션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 예컨대 김사과 김이설 안보윤 최진영 같은 이들의 소설은 추상적인 세계에 갇힌 한국소설을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연수 권여선 박민규 김애란 등의 이후 작업도 눈 여겨 봐야 한다. 한국소설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강= 다소 비관적으로 돌아봤지만 한국문학이 정체돼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미적 쇄신이나 실험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돼 왔던 세계에 대한 사유를 밀도 있게 개진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최근 주목 받는 김성중 박솔뫼 정용준 등의 작품에서 그런 희망의 기미를 확인할 수 있다.

1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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