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전문지 SPACE(528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달에 나온 책을 뒤늦게 받았다. 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세미콜론, 2011)을 거리로 삼았다.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미술계 뒷얘기들이 흥미로운 책이었다. 

 

공간(11년 11월호) 걸작의 뒷모습

걸작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예술가의 손끝에서? <걸작의 뒷모습>의 저자 세라 손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위대한 작품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즉 작가와 그의 조수가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후원하는 딜러,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들에 의해 비로소 위대한 작품은 완성된다. 그러니 걸작을 낳은 건 ‘작가’가 아니라 ‘미술계’라고 말해야 할까.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사회학자인 저자가 보여주는  ‘걸작의 뒷모습’은 실상 ‘미술계의 뒷모습’이다.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 대신에 그는 미술계를 움직이는 여러 ‘선수들’의 활동 스케치와 인터뷰를 통해서 이것이 바로 오늘의 미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술이란 무엇인가보다 미술계란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 것이 순서이겠다.  

미술계는 작가, 딜러,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옥션 전문가 등 여섯 분야의 ‘선수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미술시장을 떠올리겠지만 미술계는 미술시장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미술시장이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면 미술계는 사람들이 상주하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물론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는 공간은 아니다. 미술계는 ‘상징의 경제학’에 지배되며 명성과 신용, 미술사적 중요성, 제도권의 인정, 학력, 지능, 부, 컬렉션 규모 등의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계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 미술계의 뒷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저자는 일종의 에스노그라피(민족지학)를 시도한다. 관찰과 청취, 인터뷰, 핵심자료 분석 등을 아우르는 ‘참여관찰법’이 미술계의 사회적 문화적 특징과 내용을 통합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방법론이다. 250명 이상의 미술계 인사를 인터뷰한 것만으로도 책의 현장감은 충분히 전달된다.     

작품은 대개 고독한 작업의 결과로 탄생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와 인정은 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작가들은 다만 ‘미술처럼 보이는’ 작품을 만들어낼 따름이며, 그것이 ‘미술’이 되는 것은 미술계 사람들의 평판을 등에 업고서이다. 미술계는 어떤 작업의 결과물을 가치 있는 미술로 ‘호명’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미술만큼은 아니더라도 미술계의 역사 또한 짧다고만 할 수는 없을 텐데, 유독 지금의 시점에서 미술계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10년간이 미술사의 가장 흥미로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미술시장의 전례 없는 호황, 미술관 관객의 급증, 그리고 미술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통해서 미술계는 양적으로 비대해졌다. 더 ‘핫(hot)’해졌고, 더 ‘힙(hip)’해졌으며, 더 ‘비싸’졌다. 사람들은 왜 갑자기 미술에 열광하게 됐을까? 저자는 세 가지 가설을 이유로 든다. 먼저 예전보다 더 좋은 교육환경에 노출돼 있다는 점, 그리고 교육받을 기회가 늘긴 했지만 현대인들이 예전보다 더 적게 책을 읽는다는 점, 끝으로 글로벌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에 미술은 국제공용어이며 문자언어와 달리 공통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가 꼽은 이유이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미술작품이 매우 비싸다는 사실도 강력한 이유가 된다. 높은 가격에 경매되는 작품이 자주 헤드라인에 오르면서 미술품은 가장 대표적인 ‘럭셔리 아이템’으로 떠올랐고 전 세계 부호들의 관심사가 됐다. 금융위기가 도래하자 웰렘 드 쿠닝의 드로잉이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보다 더 안전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현대미술은 마치 부동산처럼 안정적인 투자대상이 되었다. 미술은 삶을 윤택하게도 해주지만 이제는 ‘투자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한 종목으로도 당당히 인정받는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가 저자가 다섯 국가의 여섯 도시를 돌면서 취재한 일곱 가지 이야기의 배경이다.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뉴욕의 크리스티 옥션이다. 크리스티와 소더비의 현대미술 경매 행사는 1년에 뉴욕에서 두 번, 그리고 런던에서는 세 번에 걸쳐 열리며, 이들 양대 옥션 하우스가 전체 옥션 시장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미술 컬렉터들에게 옥션은 2차 시장이다. 1차 시장 딜러는 물론 갤러리인데, 갤러리에서 구입하면 가격은 훨씬 싸지만 작가나 작품의 성장 곡선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위험이 따른다. 반면에 옥션에 나오는 작품은 시장의 검증을 거친 뒤라 그만큼 위험이 줄어든다. 옥션 현장의 생생한 중계에 이어서 저자가 안내하는 곳은 LA칼아츠의 비평수업 강의실이다. 1960년대 이후 MFA(미술학 석사) 학위가 작가의 경력으로 인정되면서 유명 미술학교의 석사학위는 미술계에 들어오기 위한 필수 여건이 됐다. 보통 이들 학교의 등록금은 연간 2만 7000달러에 달하므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꽤 돈이 많이 든다. 비록 학생들은 MFA를 Mother-Fucking Artist(빌어먹을 예술가)라고 욕하기도 하지만 작가로서의 사회적 정체성이 화랑, 미술관, 강단 등 다양한 분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기에 비평 수업의 의의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귀띔이다.   

현대미술의 또 다른 현장은 아트페어이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아트페어로 꼽히는 스위스의 아트바젤로 안내한다. 갤러리로선 입성하는 일 자체가 화제가 되기는 아트페어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면 테이트미술관에서 주관하는 터너상의 시상과정을 밀착하여 지켜보게 된다. 뉴욕에서는 패션의 <보그>에 해당하는 미술전문지 <아트포럼>의 편집부를 찾아가며, 도쿄에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 스튜디오와 베네치아 비엔날레도 여정에 포함돼 있다. 저자에게는 “매우 길고 느린 여정”이었지만 독자에게는 한바탕 회오리바람 같은 이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적어도 이런 주장에는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미술계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은 일종의 종교다.    

11.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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