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에서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코너를 옮겨놓는다. '서평은 정치다'란 화두로 서평에 대한 생각과 서평가로서의 소회를 적고 있는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도 언급되고 있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꽤나 긴 서평'으로 보고 있어서 이채롭다. 나는 소박하게 '읽기'를 의도했지만, 서평적인 면도 들어 있는 모양이다. "서평은 정치다"란 문구는 칼럼에 나오지만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 2011)에서 인용한 것이다.   

   

세계일보(11. 12. 05)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43> 서평은 정치다

매주에 두세 개씩의 서평(reviews) 쓰는 일을 여러 해째 이어오고 있다. 이런저런 연줄로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와 계간지 등에 서평을 기고하고, 두 군데 공중파 방송에 정기적으로 나가서 책 이야기를 하고, 서평집도 네 권이나 내놓은 바 있다. 내 지적 인식 욕망과 관심의 맥락에 따라 책을 읽고 그중에서 매체에 맞는 책을 골라 서평을 쓴다. 서평 쓰기는 메마른 작업이다. 공력은 많이 들지만 청고한 인격을 만드는 데도, 지식의 성채를 짓는 데도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그건 사랑 없는 섹스는 아닐지언정 출산이 배제된 섹스와 닮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평은 정치다”라는 한 문장을, 월터 카우프만의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 서평 쓰기에 투입되는 내 욕망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과 회의를 품어온 터라 이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친밀한 관계의 맥락을 만드는 게 정치의 한 기능이라면, “서평은 정치다”라는 말은 맞다. 읽어보니, 그 정치라는 게 지극히 “사소한 정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평가의 권위, 영향력, 글의 재미와 파급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서평은 현대 지식인들의 문화생활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쯤으로 취급당한다. 기껏해야 서평은 주식 사이사이에 먹는 간식이고, 본격적인 음악이기보다는 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평가의 일이란 게 번역가나 편집자가 하는 일과 겹쳐지는데, 그것은 “저자와 독서 사이에서 움직이는 중개인”이란 점에서 그렇다. 매체에 실리는 서평은 뉴스거리가 될 만한 책, 어떤 학파와 연관이 되어 있는 책이 우선적으로 선택되고, 그 책이 담고 있는 시대적·문화적 가치나 함량보다는 매체나 서평가와의 개인적 인맥이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 서평 대상이 되느냐 아니냐는 저자나 독자보다도 편집자와 서평가의 결정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주로 기자, 교수, 학자, 비평가, 젊은 작가들이 서평을 쓴다. 서평은 “저널리즘의 한 형태”이므로 서평 쓰기는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고 순발력 있는 글쓰기를 잘 하는 기자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교수나 학자들 역시 자기 분야에 대해 높은 수준의 지식과 경륜을 쌓은 사람들이니까 해당 분야의 책에 대한 서평가로서 적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젊은 서평가”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씌어진 적이 없는 위대한 책의 지고함에 기대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다. 그들은 서평을 제 존재를 번쩍이면서, 제가 얼마나 똑똑하고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지를 알리는 기회로 삼는다. 문학 계간지에 서평을 쓰는 대다수의 “젊은 서평가”들의 글은 대체로 최신 이론들을 문장의 난삽함으로 버무려 내놓음으로써 매우 현학적이다.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카우프먼은 그런 현실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서평에서 알게 된 책의 대부분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서평을 읽기 전에 먼저 책을 읽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얼마나 많은 서평들이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로 가득 차 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호의적인 서평이나 적대적인 서평뿐만 아니라 학술잡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카우프만, ‘인문학의 미래’)

간혹 서평 대상이 되었던 책의 저자가 서평가의 “왜곡된 설명과 명백한 실수”에 분노하면서 반론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은 불문학자 곽광수가 자신의 책에 대한 서평이 나온 지 십년이 지난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이라는 번역서를 내놓으며 그 책의 한 각주 형식을 빌려 김현과 박이문의 서평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펼친 경우다. 그 각주의 분량이 수십 쪽에 이를 만큼 작정하고 쓴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많은 서평들이 진지한 학문적 정밀성을 갖고 탄생하지는 않는다.

“서평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적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들 대부분이 취하는 공통 전략은 자신의 견해를 진척시킬 수 있는 기회로 서평을 이용하면서, 그 책의 주제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자신도 그다지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책 한두 권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끼워 넣는 것이다.”(카우프만, 앞의 책)

제 정신을 가진 학자라면 제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서평가들이 제 서평에 진정성, 즉 자기 패를 다 거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제 “오도(悟道)의 경지(境地)”를 눈꼽만큼이라도 드러내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이다. 이런 사정을 안다면, 곽광수 교수가 제 책의 서평에 대해 저토록 진지하고 정밀한 반론을 펼쳤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 훨씬 더 즐겁다. 그런 맥락에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은 서평의 가장 훌륭한 범례로 꼽을 만한 서평집이다. 저자를 압도하는 박람강기와 유연한 사유체계, 날카로운 통찰력, 신랄함, 번득이는 유머, 그리고 그것을 좋은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서평가의 서평집이라는 뜻이다.

지제크와 라캉에 대해 쓸 때, 탈식민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쓸 때, 테리 이글턴은 모호하지 않고 대책 없이 명료하다. 그가 데이비드 하비의 책에 관한 서평을 쓰면서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시간은 풍요로운 개념이었고 공간은 황폐한 개념이었다. (중략) 오늘날 공간은 시간을 그저 따라잡는 것을 넘어 오히려 앞장서서 끌어당기고 있다. 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너무 독특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장소라는 형태를 띤 공간이, 개념의 트럼프 패에서 조커가 되어 추상을 거부하고 모든 거대 담론을 붕괴시킨다고 본다. 이제는 시간이 지루하게 균질적인 것, 매번 똑같은 지겨운 것이 되고, 속이 찬 자궁이라는 공간성에 대조되는, 남근적인 탄도가 된다. 그리고 공간이 시간에 그동안의 복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연은 인간 역사에 자연의 권리를 행사해 왔는데, 비관적 생태학자들은 그것을 이제 세상이라는 육신에서 종양이 자라는 이미지로 본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라고 쓸 때도 그 명료함은 통찰력이라는 아우라를 두르고 빛을 뿌린다.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쓴 책에 관해 서평을 쓸 때 “데이비드 베컴이 과연 이 책을 직접 썼을지 궁금하다고? 차라리 파라오가 피라미드를 직접 지었을지를 궁금해하시라.”(테리 이글턴, 앞의책)고 넉살을 떤다. 그는 독자에게 재미와 지식, 쾌락과 통찰력을 함께 쥐어준다. 우리나라에서 테리 이글턴 같은 서평가를 만날 가능성은 한밤중에 38번 국도를 운전하며 가다가 귀신을 만날 가능성만큼이나 낮다.

우리 서평가들은 점잖거나 무던하다. 그들에게 책과 저자의 허접함과 뻔뻔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진실을 말해줄 가능성은 없다. 서평가의 내면에는 통찰가와 소크라테스적 인물과 사나운 본성을 가진 개가 공존한다. 하는 바를 보면 그들은 때로는 지나치게 날카롭고, 때로는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으르렁대고 물어뜯는 강퍅한 본성의 존재들이다. 



나는 서평집들을 즐겨 읽는다. 예전에는 김현, 김훈, 고종석이 쓴 서평들을 읽으며 지적 충만감과 기쁨을 느꼈던 적이 여러 번이다. 내 서평도 그렇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욕망일 뿐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다. 최근에도 건축가 서현의 ‘또 한 권의 벽돌’, 정신분석의 김종주의 ‘이청준과 라깡’,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이현우의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헌책방 운영자인 윤성근의 ‘심야책방’ 등등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이현우가 내놓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은 지제크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관한 꽤나 긴 서평이다. 드물게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이현우의 서평을 읽으며 그 거울에 비친 내 적나라한 욕망을 보았다! 내 존재 안에 있는 이 낯선 것, 나 자신보다 더 나 자신인 것! 쇼펜하우어가 자기 안의 낯선 괴물이라고 한 의지, 프로이트가 욕망으로 바꿔 이해한 그것, 이글턴이 지제크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풀어서 쓰고, 이현우가 다시 지제크의 책에 대해 말하며 인용한 그것!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테리 이글턴, 앞의 책)

이현우가 인용하지 않은 그 다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테리 이글턴, 앞의책)

그것이 쇼펜하우어-프로이트-이글턴-지제크-이현우-장석주 사이를 잇는다. 욕망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평과 서평 사이에서 강제적 매개의 힘으로 움직인다. 

11. 12. 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