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일정을 체크하다가 2011년의 마지막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놓는다. 어느새 1월의 일정도 잡히고 있는 걸 보면, 어김없이 또 한해가 가는 모양이다. 하긴 내심으론 2012년도 얼른 건너뛰면 좋을 법하다(어김없이 내년 12월도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그렇게 쏜살같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면 약간의 아쉬움도 없진 않지만...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고른 문학서는 김훈의 <흑산>(학고재, 2011)이다. 이건 뭐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작품이다. 그래도 옮기자면 "<흑산>은 우리의 기대를 두 번 배반하는 소설이다. 좀 더 유명한 정약용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의 형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과, 주인공인 정약전조차도 비중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정약전이 사학죄인(邪學罪人) 즉 천주교도였기에 흑산으로 유배를 가서 <자산어보>를 쓰기까지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지만, 이 소설은 종교인 이야기도 아니고, 유학자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연약하고 누추한, 정약전 주변 인물들 모두의 삶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진작에 사두었지만 사실 아직 읽진 못했으니 이달에 시간을 내볼 수도 있겠다. 작가가 참고한 책들에서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1-5>(청어람미디어)까지도 다 구해놓은 참이다. 시간만 준비되면 되겠다!
'전집'으로 가장 반가운 책은 전체 15권 가운데 1차분으로 다섯 권이 나온 <밀란 쿤데라 전집>(민음사)인데, 알라딘에는 아직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다시 번역된 몇몇 작품들과 함께 새로운 에세이집 <어느 만남>이 가장 기대가 된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고른 역사서는 김영철의 <영어, 조선을 깨우다>(일리, 2011)이다. 영어 수용사를 다룬 책인데, "이 책은 영어가 조선에 처음 들어온 이후, 구한말과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나타난 다양한 관련 사례를 통해 한국 근현대의 풍경과 역사상을 제시한다.(...) 조선의 영어 도입과 관련해서는 교육사 차원에서 몇 편의 논문이 이미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최근 디지털 DB로 구축된 원전 자료들을 검색한 후 한국 근현대논문을 참고하여, ‘영어’라는 키워드로 두 권의 한국 근대 풍경을 재현하였다." 영어에 대한 한국인의 복잡한(때론 착잡한) 정서가 새겨진 풍경이기도 할 듯싶다. 한창 영어 공용어론이 문제될 때 나온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당대, 2007)도 나란히 읽어봄직하다.
역사분야의 책으론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선비 평전>(글항아리, 2011)도 최근에 구한 책이다. 조선사도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몇달 전 아주 두툼한 <이성무의 조선왕조사>(수막새, 2011)을 구한 적이 있어서 같은 저자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조 선비에 관한 이야기로는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이 평판이 좋은 책이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서는 앤드루 커노한의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필로소픽, 2011)이다. "삶이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못한다. ‘신이 없는 세상이 반드시 허무할 필요가 있는가?’ 이 질문의 포스를 느껴보는 경험을 권한다"고 추천자는 적었다.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오는 '인생의 의미' 시리즈의 하나인데,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이 첫 권이었다. 공역자의 한 사람인 이윤의 <굿바이 카뮈>가 근간 예정으로 다섯번째 책이 되는 듯싶다.
요즘 눈에 띄는 경향은 철학자들의 시읽기인데,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 시리즈에 이어서 베스트셀러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시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11)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본다. 한층 여유롭고 능숙해진 저자의 말솜씨 덕에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라기보다는 '철학레스토랑에서 시 요리하기'로 읽힌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의 추천서는 캐스 R. 선스타인의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프리뷰, 2011)이다. 집단극단화 혹은 집단사고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저자는 이 상식에 어긋나는 듯하면서도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극단화의 현상을 명쾌하고 쉽게 설명해준다. 저자의 주장과 설명은 단순한 짐작과 추상이 아니라 많은 관련된 이론, 연구논문과 실험 그리고 사례분석으로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베스트셀러 <넛지>(리더스북, 2009)의 공저자이기도 한 선스타인의 책으론 <루머>(프리뷰, 2009)와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후마니타스, 2009)도 소개돼 있다.
극단으로 치자면 벤츠 검사까지 등장한 대한민국 검찰도 한 극단을 보여주는 듯싶은데, 검찰을 생각하는 책 몇 권도 연말 독서목록에 올려놓음직하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오월의봄, 2011), 황창화의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위즈덤하우스, 2011), 그리고 최재천 변호사의 칼럼집 <위험한 권력>(유리창, 2011) 등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경제서는 중국 CCTV의 다큐를 엮은 <무역전쟁>(랜덤하우스코리아, 2011)이다. "이 책은 중국공영방송 CCTV가 방영한 대형 다큐멘터리 <무역전쟁>을 정리한 것이다. 중상주의 이후 500년에 걸친 국제무역의 변천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동시에 국제무역에 대한 중국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물론 핵심은 '중국의 시각'이다. 찾아보니 CCTV의 다큐가 <대국굴기, 강대국의 조건> 시리즈 외에도 여러 권 출간돼 있다. <화폐전쟁, 진실과 미래>(랜덤하우스코리아, 2011)과 <월스트리트>(미르북스, 2011) 등도 세계경제의 현안에 대한 중국의 시각을 보여주는 책으로 눈길을 끈다.
덧붙이자면, 자본주의 경제의 주기적인 공황 문제를 다룬 책들도 손에 들어봄직하다. 일본의 경제학자 하야시 나오미치의 <경제는 왜 위기에 빠지는가>(그린비, 2011)가 최근에 나온 책이고, 감수를 맡은 김성구 교수의 <현대자본주의와 장기불황>(그린비, 2011)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김수행 교수의 <세계대공황>(돌베개, 2011)까지 참고하면 공황론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다.
6. 과학
김웅서 위원이 추천한 책은 김지현, 김동훈의 <별헤는 밤 천문우주 실험실>(어바웃어북, 2011)이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의 책인데, "이 과학서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장점이 있다. 우선 많은 사진과 삽화를 수록하여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천문학 내용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자리 사진을 넣어 별자리 관찰 가이드북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이다. 공저자들의 책으론 <풀코스 별자리여행>(현암사, 1999), <풀코스 우주여행>(현암사, 1999)가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것이 업그레이드 개정판 정도 될 듯싶다. 겨울밤에 별볼 일 있을 때 옆에 둘 책.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시절이 나도 잠시 있었다. 중학교 때이던가. 아마도 수학에 재능이 좀 있었더라면 그리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과 무관하지 않게 가끔씩 수학책을 사놓는다(전에는 읽기도 했다). 알렉스 벨로스의 <신기한 수학 나라의 알렉스>(까치글방, 2011)가 최근에 구입한 책이다. 중국인 저자의 <수학의 역사>(더숲, 2011)도 호기심에 사들였고. 영국 수학자 고드프레이 헤롤드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세시, 2011)까지 챙겨놓으면 그림이 좀 될 듯싶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예술서는 김윤아 외, <신화, 영화와 만나다>(만남, 2011)이다. 소개에 따르면 "현시대의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영화들 속에서 신화의 스토리텔링 골조를 파헤쳐보는 책이다. 세 명의 저자들은 창조신화, 영웅신화, 흡혈귀 전설, 중국의 천하와 강호, 일본의 신도, 한국의 무속신앙을 아우르며, 어떤 식으로 신화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의미작용을 하게 되는지 설명한다." 신화와 영화를 다룬 책은 몇 권 더 되는데, 스튜어트 보이틸라의 <영화와 신화>(을유문화사, 2005), 강대진의 <신화와 영화>(작은이야기, 2004)가 떠오르는 책이다. 둘이 만나서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해봄직하다.
8. 교양
내가 고른 교양서는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그린비, 2011)이다. 이유는 이렇게 적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고전이면서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기록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이지만 실제로 <동의보감>을 읽어본 한국인이 얼마나 되는가. 장장 25권, 번역본으로만 2,500여 페이지를 자랑하는 방대한 의서라는 게 ‘거리감’의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전공자들이나 읽을 책으로 제쳐놓기에는 <동의보감>은 너무 아까운 책이다. 선조의 명을 받고 어의 허준이 14년의 노고 끝에 완성한 <동의보감>의 편찬 이유를 고려해 봐도 그렇다. 기존의 한의학 전통을 집대성하고 조선의 백성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게끔 하라는 것이 선조의 명이었고 허준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2천여 가지의 증상, 1400종의 약물, 4천여 가지의 처방, 수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가려냄으로써 한의학을 가장 적절한 분량으로 정리하고 양생과 의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한 것이 허준이 이룬 지적 성취이다. 또 일반 백성들이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처방과 약재들을 포괄한 것이 그가 도달한 ‘대중적 보편성’이다. 특정 계급과 전문가들에 한정되었던 앎의 독점을 깨고 의학적 앎을 세상 널리 퍼뜨리고자 한 게 허준의 소망이었다면 <동의보감>은 오늘날 ‘대중지성’의 시대정신에 더 없이 잘 부합하는 교양고전이면서 또 그래야 한다. 고미숙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는 그 <동의보감>의 세계로 안내하는 가장 생기 넘치는 길잡이다.
덕분에 구입해둔 책이 <한권으로 읽는 동의보감>(들녘, 1999)이다. 말이 '한권'이지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다! 김남일의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들녘, 2011)도 같이 구했는데, 미칠 것까지야 없지만 <동의보감> 정도는 서가에 상비해놓으면 좋겠다. 고전이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이니까.
9. 실용
손수호 위원이 추천한 실용서는 박수용의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김영사, 2011)이다. "쥘 베른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은 <시베리아 호랑이-3대의 죽음>의 바탕글"로서 시베리아 호랑이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한 한 PD의 고투와 경험을 담고 있다. "'자연은 연출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라고 믿는 한 사나이의 장쾌한 기록"이라는 평이다. 시베리아 탐험의 기록으론 조지 케넌의 <시베리아 탐험기>(우리역사연구재단, 2011)도 몇달 전에 나온 책이다.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2005)와 함께 손꼽히는 여행기라 한다.
10.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자음과모음, 2011)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자음과모음, 2011)을 펴내고 세 차례 강의까지 하고 있으니 나로선 2011년의 마무리도 지젝이다. 연초에 <폭력이란 무엇인가>(난장이, 2011)를 공역해 냈으니 시작도 지젝이었다. 내놓을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치'는 한 셈이 아닌가 싶다. 지젝을 재미있게 읽는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한편, 올해는 예외적으로 묵직한 책을 내지 않아 근황이 궁금했던 지젝은 내년에 헤겔에 관한 대작(무려 1200쪽이다!)을 들고 다시 우리 곁으로 온다. 국내 출판사에서 엄두를 낼 만한 분량이 아니어서 번역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일년 내내 읽을 만한 책이다. 여전히 괴물스런 그의 근황이 반가우면서도 경이롭다...
11. 12. 04.
P.S. 12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괴테의 <친화력>이다. 지난달에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꼽았었는데, <친화력>은 <마의 산>과 무관하지 않다. 독일의 저명한 비평가 라니츠키가 "나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괴테의 <친화력>보다 더 나은 독일어 장편소설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도 괴테 전공자인 오순희 교수의 새 번역본 <친화력>(서울대출판문화원, 2011)이 나왔고 벤야민의 비평 <괴테의 친화력>(새물결, 2011)도 번역돼 나왔다. 충분히 다시 읽어볼 만한 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