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어떤 걸 써야 하나 고심하다가 고른 게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21세기북스, 2011)였다. 주로 색깔어휘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서평에서는 자세히 적지 못했다.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동녘사이언스, 2008), 벤자민 리 워프의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나남출판, 2010) 등과 같이 읽으면 유익할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07) 언어는 본능인가 문화적 산물인가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이렇게 고백했다. “스페인어는 신에게, 이탈리아어는 여자에게, 프랑스어는 남자에게, 독일어는 말에게 이야기할 때 사용한다.”

이렇듯 각 나라 언어에는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에 걸맞게 사용분야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이런 통념을 연장하면 ‘독일어는 매우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가장 정교한 철학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 심지어 독일 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도 독일어 덕분이다.

과연 언어는 민족성을 반영하며 언어가 다르면 사람들 생각도 달라지는 것일까. 대답은 일단 ‘그렇지 않다’다. 보편문법을 제창한 저명한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이래로 언어학의 지배적 관점은 언어가 본능이라는 것.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은 이런 관점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언어의 토대는 우리 유전자에 코딩돼 있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언어는 똑같다는 것이 촘스키와 핑커의 관점이다. 이들은 모국어가 우리의 사고에 설사 영향을 미치더라도 아주 사소하다고 본다.

‘언어로 보는 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가 눈에 띄는 것은 그런 배경에서다. 저자는 촘스키와 핑커가 대표하는 20세기 언어학의 지배적 관점을 뒤집고 다시금 언어와 문화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언어상대주의를 주장한다.

유사한 주장이 이미 20세기 중반에 미국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자민 워프에 의해 제시된 적 있었다. ‘언어 상대성 원리’ 혹은 ‘사피어-워프 가설’로 불리는 이 견해에 따르면 모국어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과 인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사피어와 워프는 자신들의 주장을 너무 극단적으로 밀어붙였고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박약해 학계에서는 배척됐다. 그런 만큼 도이처가 또다시 언어상대주의를 들고나온 것은 자신의 말대로 “마치 폭탄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일처럼 보인다.”

물론 저자가 무작정 ‘오래된 이론’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훨씬 탄탄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우리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서 문화적인 관습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고난 본성이라고 여기는 많은 특성들이 실제로는 문화적 특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거울이고 렌즈라는 것이다.

단순한 사례로 우리 몸에서 손, 손가락, 발, 발가락 같은 기관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살펴볼 수 있다. 팔과 손은 마치 아시아와 유럽처럼 연결돼 있는데 팔과 손은 과연 하나인가, 둘인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게 정답이다. 히브리어에서는 팔과 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야드’란 말로 부른다. 심지어 하와이어에서는 팔과 손, 그리고 손가락까지를 모두 한 단어로 지칭한다. 그런 히브리어 화자의 말을 영어나 한국어 화자가 이해하려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머리와 머리카락을 보통 ‘머리’라고 통칭하는 한국어 화자가 ‘머리를 자른다’고 말할 때 대경실색할 외국인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하와이어 팔·손·손가락 모두 한 단어
언어가 자연에 근거하는지 문화의 소산인지를 놓고 벌어지는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은 색깔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게 묘사된 걸 두고 고대인들이 색맹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색깔 어휘의 차이는 생물학적 진화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문화적 진화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화의 승리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언어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정도라는 게 저자의 정직한 고백. ‘단수와 복수를 언제나 구분하는 영어와 달리 이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어가 사람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도 그가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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