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맡에 있는 책의 하나는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길, 2011)이다. 독문학, 특히 아도르노 사상을 전공한 저자의 학술적 에세이로 부제는 '1만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 같은 독문학자인 임홍배 교수는 추천사에서 "김유동 교수의 <충적세 문명>은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작이자 대작이다.(...) 인류 문명사 1만 년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지적 모험은 요컨대 소유와 지배의 전일적 체제가 '악마의 맷돌'처럼 작동하는 자본의 시대를 과연 어떻게 견디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평했다. 인문학자의 거시적 문명론이 놀랍기도 하면서 다소 생경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전체는 비진리'라고 말한 아도르노 연구자가 '전체를 위한 사유'를 제안한 것도 이채롭다. 전체를 읽어봐야 의문점을 풀 수 있을까?.. 일부 오타는 원문 그대로이다.

    

교수신문(11. 11. 14) 문명의 잔해 위에서‘전체를 위한 사유’를 가동하다  

은둔형 학자 김유동 경상대 교수(56세·독어독문학과)가 문제작을 들고 돌아왔다. 『충적세 문명-1만 년 인간문화의 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길, 2011.10)이 그가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아도르노 전문가로 통하는 그의 新作제목이 독특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 책을 가리켜“문명사를 백과전서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근대 이래 섣부른 발전사관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라고 평가한다.

십수 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김유동 교수가『반야심경』,『 도덕경』에서부터『백년의 고독』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지적 자산을 섭렵해서 일궈낸 이 책의 핵심은 무엇일까. ‘소유와 지배’의 문명을 넘어‘조화와 균형’의 문명으로 나가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압축할 수 있다. “‘소유와 지배’에 기초한 人爲의 문명은 그‘타자’인 자연 또는‘원시문화’와의 대비 속에서 그 의미와 무의미(덧없음)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기본 단초에서 논의를 전개해‘전체’에 대한 하나의‘그림’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다. A.N.화이트헤드의‘관념의 모험’과 같은 사유의 모험과 실험, 사유의 놀이가 이 책 전체를 이끌고 있다.  

충적세, 즉 신생대 제4기의 마지막 시기인 약 1만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의 광활한 공간을 그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병약한 신체 조건이 한몫한다. 그는 사실 이 책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책을 출간함으로써 “노출기피적인 은둔적인 생활이‘노출’될 때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도 컸다. 그는 痛風을 심하게 앓고 있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서 어떤 대안과 비전을 모색하는 일보다 모더니티에 의해 추동된 서구 현대문명의 위기를 읽어내고, 이를 사유의 지평에서 곰삭혀보는 일이 수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충적세문명’이란 말의 이면에는, 그래서 無와 같은 深淵의 바람소리가 휭휭 지나간다. 그에게 사유의 모험, 사유의 놀이는 과잉된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직시하고, 거듭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세계다.

그가 지식인의 책무를 변혁에서 찾기보다는‘사유의 재가동’에서 찾는 것도 일리 있는 접근이다. 그러나‘1만 년의 인간문화’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라만차의 騎士’처럼 무모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가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비교문화구조학’도 정교한 개념의 세례를 거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징후 읽기’라는 예술작품 읽기 방식의 주관적 접근도 모호함을 증폭시킬 수 있다. 김유동 교수를 書面으로 만났다.

△ 문명의 위기로 진행된 인류 역사 1만 년을 조망하기 위해‘비교문화구조학’적 성찰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문학-예술 연구로부터 발상을 얻은,‘ 비평(에세이)’에 가깝지 않습니까?

"네,‘ 비평(에세이)’의 영역에 가깝다는 지적은 맞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에세이로서의 문학비평을 문화비평으로 확장시킨 것입니다. ‘비교문화구조학’의 정밀한 개념화가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정밀한 학문(exakt Wissenschaft)을 지향하는 것은 과학의 굊想일지 모르지만 불확실한 삶과 현실에 다가가려는 에세이의 방법은 규정과 판단보다는 뉘앙스가 많고 어설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는지는‘방법’의 문제를 다룬 서론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변명이 되겠지만, 간단히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같은 ‘전체’를 지시하는 용어지만 너무나 남용되면서 닳아빠진 동전처럼 액면가가 마모돼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문화구조라는 용어가 나왔다면, 문화구조에 대한 연구는 내재적 방법으로 구조의 틀을 드러내보려는 시도지만, 문화구조의 의미는 다른 문화구조와의 비교 속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에서 비교문화구조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 모더니티가 추동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징후적 읽기’로써 진단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어쩌면 이런 접근 자체가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은 아닌지, 그래서 마땅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그렇게 비난 받지 않아도 되는, 관념의 과잉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도 아니고요.

“정교한 개념화를 거부하는, 아니면 못하는 이유는, 학문이라는 것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지만 파악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파악한다는 것 자체를 음미해보면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행위로 문명의 常겤로 설정한‘소유와 지배’를 되풀이하고 강화하는 것이라는‘반성’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문명의 위기’로부터의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인정합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모든 학문의 전제로 깔려있는‘진보’와‘서구중심주의’를 반성하면서‘타락의 역사’를 말하는 동서양의 고전과 종교사상을 새로운 척도로 부활하게 만들었겠지요. 『충적세 문명』이 만든 것은 암울한 그림으로‘구원적 비평’에 기대어 지난 세월과 삶을 어루만지는 작업인데요, 그런 고통을 만든 요소들이 객관적으로 극복된 실질적 희망이 보이거나, ‘이론’이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면 전혀 다른 별자리를 만들어 밝고 긍정적인 그림을 만들 수 있겠죠.

‘징후 읽기’가 그렇게 새로운 독법이 아니라는 지적에도 동의합니다. 사실 나는‘논리’라는 것은 별것 아니고, 경험하고 인식한다는 것 또는 보고 느낀 것을 음미하고 분별하는 행위는, 단순한 知覺작용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전체’나‘삶’,‘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징후읽기’라고 생각해요.‘ 징후 읽기’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맥락보다는,‘ 전체’,‘ 신’,‘ 진리’,‘법’등은 알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인식행위라는 것은‘부분’을‘전체’의 징후로 해석함으로써‘전체의 그림’을 잠정적으로 만들어 보는 놀이라는 맥락입니다.”

△ 선생님의‘전체에 대한 인식’욕망은 어딘가 헤겔적인 냄새가 납니다. 학자의 고유한 학문전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아도르노 전공자로서 독일적 정신의 흔적이겠죠. 이번 책에서 아도르노에게 많은 부분 의존한 것은 그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인가요?

“근대 문화구조의 후발주자로 세 차례 대전의 중심이며 희생자인‘독일사의 비극’은 독일 지성들에게‘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독문학도이지만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논문을 쓴 제게 독일의 변증법적 이론은 당연히 배여있을 테지요. 독일정신을 공부하면서 아도르노, 하버마스, 심지어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프레드릭 제임슨 등을 연구했지만, 2차 대전 중 미국이라는 망명지에서 파국의 구세계를 지켜보는 아도르노의 치열한 글쓰기나 그 뒤에 행한 세상에 대한 진단은, 파국에 이르렀던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험사회자 전 세계적 보편성을 얻은 상태에서는 지금 다시 설득력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도르노의 현재성은 전후의 황금시대보다 오늘날에 더 절실한 현재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 앞으로의 연구, 저술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래는 모르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세상뿐 아니라 저 자신의 실존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속에서 어떤 침전물이 생기고 어떤 욕구가 일어날지 두고 봐야겠네요. 20년 전에 쓴『아도르노와 현대사상』에서는 19세기의 낙관주의적 문화 구조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실천이론’이 20세기 전반 ‘파국’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아도르노의 ‘패배주의적 이성’으로 바뀌었는가가 기본적인 단초였는데, 책 출간 후의 세상을 살면서는‘문화산업’부분(지금 세상에서는 이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데)이 너무 빈약해, 이걸 보충할 책은 내야 할텐데라는 책무는 느낍니다만, 열려있는 미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지요.” 



김유동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와 프레드릭제임슨의 초청으로 미국 듀크대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아도르노 사상』(문예출판사, 1993), 『아도르노와 현대사상』(문학과지성사, 1997) 등을 저술했으며,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마르 크스주의』(한길사, 2000),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 아도르노의 문제작『미니마 모랄리아』(길, 2005) 등을 번역했다. 이번 신작에서 전체를 사유하려는 독일 정신의 흔적, 특히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지적 편력과도 관련 있다.(최익현 기자)  

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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