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인물란의 톱뉴스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타계 소식이다. 날짜로는 또 오늘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인물란이 부쩍 붐비는 즈음인데, 나는 그냥 소박하게 내가 아는 지인의 인터뷰 기사만 옮겨놓기로 한다. 방송대TV의 '책을 삼킨TV'에 출연하면서 알게 된 가수 '사이'다(처음엔 '싸이'인 줄 알았다). '유기농펑크포크'란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그의 소박한 인생철학이 경향신문의 창간 65주년 기획특집 기사를 탔다.
가수 사이의 은행 통장 잔액은 0이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그는 “돈이나 직장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떨쳐낸다면 사람들이 돈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폐가를 고쳐 살고 있는 집 앞에서 지난달 28일 사이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11. 10. 06) “텃밭 있고, 노래하면 됐지 돈이 왜 필요하죠?”
‘슈퍼 백수’ 가수 사이(38)는 시골에 산다. 전업농은 아니다. 가난하지만 굶지 않고 불편한 것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5년 전 서울을 벗어났다. 참깨, 고추, 호박, 배추 등 필요한 먹거리는 집 앞 텃밭에서 해결한다. 더 많이 수확하려고 부지런히 밭일을 하지도 않는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먹는다. 올해는 처음으로 텃밭에 벼도 심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읽고 싶을 때 읽는다.
“그냥 돈 버는 일 안 하고 편히 살고 싶었어요. 산 입에는 거미줄 치지 않잖아요. 시골은 생활비가 덜 드니 많이 안 벌어도 되고요. 거의 모든 문제가 돈에서 나오는데 도시에서는 그런 생활이 불가능하잖아요.”
그는 백수는 아니다. 스스로 노래를 작사·작곡해 앨범을 두 장까지 낸 가수다. 두번째 앨범은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행사 중 ‘거리악사 페스티벌’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제작비를 지원받았다. 그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이 늘면서 각종 공연행사나 시민·사회단체의 집회에서 노래를 해달라는 전화도 많아졌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지런한 걸 좋아하잖아요. 특히 시골에서는 더 그래요. 근면에 대항하는 사람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미에서 슈퍼 백수라고 불러요. 사실 빈둥거릴 때 가사가 잘 떠올라요.”
“사람들은 도대체 내말을 믿지 않아/ 돈 없어도 시골에서 팔자가 늘어진 걸/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고 전기세 1600원/ 텔레비전 핸드폰 세탁기 냉장고 없어도 좋아//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그냥 줄이고 덜 쓰고 가난해도 괜찮을 걸….”(후략)>
그가 집에서 녹음·편집·앨범디자인 등 모든 것을 혼자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음반에 실린 첫 곡 ‘아방가르드 개론 제1장’의 노랫말이다. 그가 가장 많이 낸 전기료가 한 달에 1600원이었다. 경남 산청에서 살 때다. 그러다 2년 전 더 많은 ‘사이’ 그러니까 더 많은 관계를 맺기 위해 충북 괴산으로 왔다. 폐교인 신기학교 사택에서 살다가 지금은 동네주민이 내준 칠성면 율지리의 폐가를 개조해 살고 있다.
“항상 빈집을 찾고, 농사도 남이 안 쓰는 땅에서 지어야 하니 개간해서 밭을 만들면서 화전민처럼 살았죠. 그러다 괴산에 와서 정말 넉넉하게 살고 있어요. 정말 전기의 고마움을 느꼈어요. 음식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고. 아마 남들처럼 소비하며 살아왔다면 그런 행복은 못 느꼈겠죠.”
그는 통장에 1원 한 푼 없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불안해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덜 먹으면 되니까. 사실 살림은 산청에 있을 때보다 넉넉해요.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하지만 지금처럼 넉넉하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돈이 생긴다고 저축할 생각도 없어요. 돈 생기면 읍내 나가서 느티(아들)랑 짜장면도 사먹고 쓰면 되죠. 저희는 엥겔계수가 100이에요. 하하.”
그는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곡을 스스로 작사·작곡한다. 자칭 ‘유기농 펑크포크’의 창시자다. 겉은 포크인데 내용은 펑크 스타일이란다. 사람들이 하도 음악장르가 뭐냐고 물어보기에 지었다. 그의 이름처럼 뭔가와 뭔가 사이에 낀 애매한 장르다. 유기농은 시골에 살기 때문에 붙인 일종의 군더더기란다. 사실 자연과 생태는 그의 음악에 중요한 배경이다.
‘당근밭에서 춤추고 있는 노을은 노을보다 아름다워라/ 게으르다고 욕하신 대도 어디까지나 즐거운 마음입니다/마루에 누워 룰루랄라 죄송합니다/ 가난해도 괜찮다고 아무리 얘길해도/얘길해도 믿질 않으니 이것 참 환장할 노릇/새우깡 라깡 데리다주고 어머니 앞에서 고백해봐요/당근밭 노을은 혼자보기 안타까워라.’(당근밭에서 노을을 보았다)
부산 가난한 달동네에서 태어나 그냥 음악이 좋았다. 학교(해동고)에서도 옆 교실까지 들릴 정도로 노래를 불렀다. 전교에 소문난 가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에 와서는 국립극장 기관실에서 1년반 동안 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돈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우울한 음악에 심취했다. 마치 신발을 쳐다보고 힘없이 걷는 것 같다는 ‘슈게이징(Shoegazing)’ 장르였다.
“2004년쯤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 중인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밥을 해주던 모임 ‘투쟁과 밥’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밴드를 만들었어요. 이주노동자들의 엉성한 발음으로 하는 구호가 너무 쏙쏙 가슴에 와 닿았어요.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죠. 거지처럼 살아도 괜찮구나 하고 겁이 없어졌죠. 시식코너에서 배 채우면서도 즐거웠어요.”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홍대앞, 철거민촌, 새만금, 평택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지율 스님이 천성산 관통도로 건설을 반대하며 단식할 때는 광화문 옆 공터에서 100일 동안 매일 공연을 했다. 스님이 고마움의 표시로 유럽 생태공동체를 둘러볼 수 있도록 주선해줬다. 8명이 1000만원을 들고 2주 동안 놀았다. 거기서도 길거리공연을 했고, 마을에서 일도 하며 밥도 얻어먹었다. 돌아올 때는 200만원이 남았다. 생태에 관심을 갖고 시골로 내려갈 ‘용기’가 생긴 것도 이때다.
“두려움 때문인 거 같아요. 돈 없고, 다닐 회사 없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집착하고. 그건 음악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홍대도 자본에 먹히고 있잖아요. 외국 뮤지션 불러오는 비싼 티켓값의 무대에 서지 못하거나 TV의 밴드 발굴 프로그램에 들지 못하는 2류라는 두려움이 퍼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올해 ‘사고’를 쳤다. ‘돈이 위주가 아닌 사람이 주인공인 축제를 위해, 서울이 아니라 지역 그것도 시골에서도 잘 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작고, 어설프고, 불편한 축제를 준비했다’(안내문에서 인용).
지난 3일부터 1박2일 동안 ‘제1회 괴산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장르별로 홍대에서 유명한 뮤지션들을 한 팀 한 팀 고르고 설득했다. 자신과 경기 명창 권재은씨 등 8팀을 꾸렸다. 괴산에서 같이 음악하는 친구 집 앞 유기농 텃밭에 공연장을 만들었다. 화장실은 땅을 파서 간이로 설치했다. 무대를 밝힐 조명등만 설치했다. 객석은 손님들이 가지고 온 돗자리였다.
“돈이 짜놓은 것만 보지 말고 축제는 만들면 된다는 페스티벌 취지에 다들 동감해줬어요. 사실 참가한 팀들은 모시기 힘든 사람들이죠. 관람료는 즉석에서 자발적으로 내는 후원금이어서 얼마를 줄지도 몰랐어요. 그래도 성공할 거라 확신했어요.”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후원금도 제법 모여 뮤지션들에게 차비라도 줄 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후원을 받았는데 150만원이 모였다. 공연자들과 관객 모두 즐거워했다. 잠자리나 음식, 화장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150만원만 있으면 150명이 함께 잘 먹고, 잘 놀고, 춤추고, 좋은 추억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죠.”
여기저기서 축제를 더 키우자고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다.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크기와 사람들이 모여서 비슷하게 놀 수 있게 할 생각이다. 키우면 골치 아픈 일이 많아져서다. 그는 스스로 “게으르다”고 했지만 게으른 것 같지 않았다. 어쩌다 본 그의 공연 일정표는 빽빽했다(가을이면 으레 성수기라서 그렇단다). 방송대 케이블TV 책소개 프로그램에 격주로 출연한다. 음악이 그를 누구보다 행복하고 부지런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고.(박재현 기자)
11. 10.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