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있는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지난달 15일부터 이달 30일까지 '몹쓸 낭만주의'라는 기획전을 연다(http://www.arkoartcenter.or.kr/artcenter_kor/exhibition/exhibition_artcenter_pr.jsp). 20명의 작가가 출품한 작품이 두 곳의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이 전시회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자료로 쓴 발표문을 옮겨놓는다. 낭만주의란 기표, 몹쓸 낭만주의란 기획에 대한 소감을 적었다.   

몹쓸 낭만주의? 몹쓸 낭만주의! 몹쓸 낭만주의는 우리가 혹은 우리시대가 낭만주의를 다시 소환하고 호명하는 이름이다. 낭만주의는 ‘몹쓸’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나서야 동시대 미술장 속으로 ‘재입장’한다. 그것이 재입장의 조건이다. 낭만주의가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 위한 방책이고 간계이다. 그것은 왜 몹쓸 것인가. 왜 몹쓸 낭만주의인가. 

거창하게 역사적 낭만주의를 다시 회고할 필요는 없겠다. 낭만주의는 정의 불가능하다는 ‘엄살’도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용도에 맞게 개념을 한정하자면,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대한 옹호이고, 규격화된 형식에 대한 조롱이며, 현실 너머의 이상에 대한 동경이고, 과도함에 대한 예찬이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가 시를 일컬어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달리 낭만주의에 대한 정의로도 유효했다. 낭만주의는 그렇게 규범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레 흘러넘친다. 그것은 거침없다. 바로 그렇게 거침없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도전적이고 도발적이며 반항적이다. 낭만주의는 자유를 구가하며 혁명을 노래한다. 릴케의 시구를 빌리자면 ‘너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세상은 한때 혁명의 시대였고 낭만의 시대였으며 낭만주의의 시대였다. 세상은 바뀔 것처럼 보였고, 바뀌는 게 응당했으며, 그렇게 뒤바뀔 세상은 역사적 필연으로도 보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계산되고 관리되는 사회?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며, 모든 리스크는 주식처럼 분산‧관리되고, 개인은 스펙과 커리어로 통제된다. 간명하게도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낭만주의는 역사적 과오이거나 향수이거나 시대착오적 광기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낭만주의, 너는 졌다’라고 현실은 말한다. 한때 낭만주의는 자신의 정점에서 예술을 절대화하고 예술가를 세계의 새로운 창조자로 공포했지만, 이제 그것은 신화가 됐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술일반의 대명사로까지 격상됐던 낭만주의는 예술의 과거사이자 뒤안길이 되었다. 현실을 과소평가한 대가인가. 혹은 현실의 저주인가.     


강민수, idyll(광장), 혼합기법, 155x195, 2010 ⓒ강민수 

그리하여 낭만주의는 죽었다. 예술은 낭만이 아니다, 라는 부인도 예술가들의 입에서는 나왔다. ‘예술이 밥 먹여 주더냐’라는 유구한 조롱도 맞장구치며 이와 함께했다. 예술은 현실이고, 예술은 실용이라는 선언도 어쩌면 놀랍지 않다. 하지만, 방부 처리하여 냉동고에 집어넣듯이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예술은 무엇에 대한 믿음이던가. 우리에게, 우리시대에 여전히 예술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다면, 그리고 여전히 예술에 어떤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예술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자 꿈이고 우리 감각과 감수성의 갱신을 의미한다면, 예술은 꿋꿋하게도 여전히 낭만적인 것 아닌가. 낭만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자기 자리이다. 어떤 것의 최대치를 그 본질로 규정할 수 있다면, 낭만주의는 예술 자체이기도 하다. 현실과의 영원한 불화를 자기 존재의 불쏘시개로 갖는 한, 예술은 언제나 낭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낭만주의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이면서 낭만주의가 되돌아오는 이유이다. 컴백홈. 컴백낭만주의.   

하지만 이 ‘돌아온 낭만주의’는 현실의 압도적인 위세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낮춘다. 낭만주의는 배제의 제스처, 거세의 포즈를 동반할 때만 현실 속으로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검열을 통과하려고 할 때 이제 낭만주의가 붙일 수 있는 표찰은 ‘새로운’이 아니라 ‘몹쓸’이다. 몹쓸 낭만주의는 목에다 밧줄을 건 낭만주의다. 당신은 이 낭만주의에 대해 마음껏 욕하고 비아냥거려도 좋다. 이것은 ‘몹쓸’ 낭만주의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용어들을 무료로 대여해줄 수도 있다. 무슨 뜬금없는 낭만주의냐고 반문하는 건 기본이다. 아직도 그대는 낭만주의냐고 조롱할 수도 있겠다. 혹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낭만주의도 돈이 되나요?  

그런 포즈가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그건 당신의 몫이다. 잘 챙겨 가시길 바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몹쓸 낭만주의’란 명명 자체가 당신의 고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전시가 앞세운 ‘주권적’ 제스처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비난과 비방과 비아냥거림은 전혀 새롭지 않은 ‘표절’에 불과하다. 당신의 안목은 당신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새롭지 않다. 그것은 미적이지 않으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재미도 없다. 당신이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몹쓸 낭만주의’는 그런 점에서 한 번 더 몹쓸 짓을 했다. 이 시대에 감히 예술이 살아있다고 말하려는 시도, 그럼으로써 현실의 승리를 껍데기로 만들려는 시도 말이다. 자신의 목을 내놓은 낭만주의는 이로써 한 번 더 부활한다. 그리하여 낭만주의가 돌아왔다. 이번엔 좀 몹쓸 놈이다.  

11. 10.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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